경상남도 하동 옥종면 중촌마을 은행나무_여러 그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음을 오감으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계절이 봄이다. 겨우내 죽은 듯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앞다퉈 생존 신고를 하듯 꽃망울을 터트리는 나무들은 마치 새로운 한 해를 또 잘 살아보라는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코끝을 스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발을 붙잡기도 한다. 담장 넘어 어느 집에서 흘러나온 천리향의 꽃향기가 봄을 오감으로 느끼게 한다. 어디 꽃 뿐이랴.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면 가지는 연한 분홍빛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연한 풀잎의 새순이 돋아난다.
경상남도 하동에 있는 6백 살 은행나무 어르신도 머잖아 아기의 손바닥처럼 여리디 여린 새순을 살며시 펼쳐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 어르신의 진가는 나무 전체가 청정한 푸른 은행 잎으로 덮히는 여름이 오기 전, 3월 이맘때 보아야 오히려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높이가 무려 38미터, 둘레는 어른 예닐곱 명이 둘러 서도 모자랄 만큼 넓은 10미터에 달하는 거구를 당당히 드러내 놓고 선 모습은 용맹한 장수처럼 위풍당당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뭔가 이상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치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니라 일곱 여덟 그루의 나무들이 모여 그룹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 2023년 겨울 은행나무,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가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나무는 엄연히 한 그루의 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나무의 나이테가 있는 원줄기의 3분의 2 정도가 썩어서 없어졌고, 그 빈 자리에 나뭇가지의 일종인 맹아들이 직립으로 자라 한 그루의 나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품 안에 가지들이 다시 자리를 튼 모양새로 1세대, 2세대 나무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 빗대기도 했는데 가지만 앙상한 모습은 실제 웅장한 건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 나무 내부에서 하늘이 보일 정도로 나무의 내부가 텅 비어 있다.2023년 가을 촬영
오랜 세월 이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겨온 마을주민들은 진작부터 이 나무의 속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민들 사이에 이 나무는 동굴이 있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임산부가 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아기를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렇다면 나무는 대체 속이 어느 정도나 비어 있는 걸까? 하동에서 나무 병원을 하는 김철응 원장에게 의뢰해 나무의 내부를 초음파로 측정을 했다. 그 결과 나무의 직경은 3미터에 달하는데 그 중 2.5미터 정도가 비어 있는 것으로 측정이 됐다. 그 비어 있는 나무 속에 맹아들이 여러 개 자라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가 모여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 나무의 초음파 사진, 푸른 색 부분이 다 비어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은행나무 어르신은 나무의 몸통 3분의 2가 비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6백 년이 넘는 세월을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것일까?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뿌리가 제 기능을 못해서입니다. 줄기 때문에 부러져 넘어지는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아요. 이 나무는 속은 비어 있지만 뿌리 쪽이 생장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와락 감동이 밀려왔다. '그래, 중요한 것은 뿌리지.' 우리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나무의 화려한 풍체에 머물러 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 당당한 풍체를 유지하기 위해 뿌리는 물길을 찾아 사방 팔방으로 뻗어나가 흙을 붙잡고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웬만한 비바람 뿐 아니라 벼락 조차 견디고 해마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비단 나무뿐이랴, 사람도 웬만한 고난과 시련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다. 아무리 화려한 잎을 매달고 있어도 뿌리가 약하면 비바람 한 번에 넘어가 버릴 수 있지만, 뿌리만 튼튼하면 어떤 고난과 시련도 견디고 새날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새삼 '나의 뿌리는 과연 얼마만한 크기일까?' 되돌아 보게 하는 6백살 은행나무 어르신이다.
▲ 2023년 12월, 잎을 다 떨구고 가지만 남은 은행나무, 마치 하나의 건축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은행나무가 이렇게 오랜 세월 마을 중심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정성도 한몫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언제인지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이 은행나무 할매에게 제를 모셔왔다.
해마다 음력 정월 그믐, 밤 12시면 나무 할매에게 제를 올리는데, 산모를 품어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 때문에 제사상에는 특이하게 미역국을 끓여 올린다. 나무의 연대기는 이순신 장군과도 연결이 되는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할 때 부하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어갔다는 전설도 있다.
6백 살을 잡수신 하동 옥종 은행나무에 연한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곧 나무 전체가 푸른 잎으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무의 텅 빈 속은 모습을 감추고 거대한 한 그루 나무처럼 보인다.
▲ 하동 옥종면 청룡리 6백살 은행나무 나무 높이 38미터, 둘레가 10미터에 달하는 은행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253호 2023년 여름 촬영
하동 옥종의 은행나무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일 년에 두 번은 봐야 한다.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내 마치 거대한 건축물처럼 보이는 지금과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차려입은 가을의 모습이다.
경상남도에서 가장 큰 나무라는 이 은행나무 어르신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가지마다 풍성한 은행 열매를 매단다. 그 양이 수확을 하면 무려 백 가마에 달한다고 하는데... 가난한 시절에는 은행 열매를 주워 내다 팔아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긴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은 은행 열매를 주워 밥을 짓기도 하고 백숙을 해서 나눠 먹기도 한다. 대부분 연세가 칠팔십을 넘은 마을 어르신들도 은행나무를 '할매'라고 부른다. 오며가며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마을 할머니들은 기도한다.
" 할매요, 올해도 우짜든동 건강하게 열매를 많이 많이 맺어주이소."
지난 2023년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날씨가 더워 할머니들 보시기에 최악의 단풍이었다고 하는데 부디 올해는 할머니들이 기대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가을 옷을 차려입고 백가마의 은행을 주렁주렁 맺으시길 새봄에 기도해 본다.
▲ 경상남도 기념물 253호. 하동 옥종면 청룡리 은행나무. 수령 600년. 2023년 가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