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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Mar 27. 2024

강물소리마저 품고 싶은 외나무다리

-'엄마야, 누냐야 강변살자' 바로 그 풍경같은 경북 영주 무섬마을

사진이든, 영상이든 스쳐 지나가다가 언뜻 봐도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보고 마음에 고이 담아 둔다. '언젠가는 한번 가 봐야지' 이 마을이 그랬다. 오래전 마음 갈피에 담아둔 곳이다. 흰 눈 쌓이는 겨울도 아니고 꽃들이 앞다퉈 피어나기 전인 3월은 자연 속으로 떠나기엔 좀 어정쩡한 계절이긴 하지만 덕분에 어디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마침 시간이 난 김에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길을 나섰다.   
   
경상북도 영주시 무섬마을,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오래 마음에 품으며 상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감탄을 자아냈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아담한 무섬마을 옆으로 강이 흘러간다. 강에는 넓은 금빛 모래톱이 형성돼 있고 무엇보다 나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았던 외나무다리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세상 밖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됐다는 외나무다리, 폭이 30센티미터에 불과한 외나무다리는 곡선으로 휘어지며 150미터나 이어져 있다. '외나무다리'는 1983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무섬마을 사람들을 세상 밖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 무섬마을과 세상을 연결하는 외나무다리 ⓒ 미전


처음 다리를 놓은 이는 누구였을까? 다리가 놓이기 전 무섬마을은 내성천에 가로막혀 외부와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해마다 한 집에서 나무 한 그루씩을 해오도록 했다고 한다. 그 나무를 잘라 이어 붙여서 마을 밖으로 나가는 다리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산에 굵은 나무가 흔하지 않던 가난한 시절, 외나무다리의 폭은 더 좁고 가늘어 위태했다고 한다. 무섬마을 여인들은 이 외나무다리를 따라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가 상여를 타고 떠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을은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었다. 좁고 위태로웠던 다리 덕분에 무섬마을은 고립됐고, 고립된 덕분에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노랫말이 딱 떠오르는 그대로의 풍경인 무섬마을. '무섬'이라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말이다. 내성천 강변에 있는 무섬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이 40여 채 모여 있다.
             

▲ 무섬마을 전경, 40여채의 전통가옥들이 모여있고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다 ⓒ 미전


그냥 잠깐 들렀다 가는 게 아니라 이 강변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하루 묵기로 한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 '만죽재', 병자호란 후 은둔 선비의 삶을 실천하고자 이 마을에 든 반남 박씨 박수가 1666년 건립했다는 집이다. 무섬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집이 9채 있는데 만죽재도 그중 한 곳이다.
             

▲ 만죽재,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 미전


일제강점기에는 지역 항일의 중심이었던 이 마을에 있는 '아도서숙'이 항일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31년 9월, 일경 1개 소대가 '아도서숙'으로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해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했다고 한다. 1933년 7월에는 일경이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강제로 폐쇄시키고 말았다. 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무섬마을은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다.

만죽재는 여러 채의 집이 있는데 그중 내가 묵기로 한 집은 안채, 집은 경북 지방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라는 ㅁ자 구조였다. 중간에 마당이 있고 ㅁ자 형태로 안채, 사랑채, 부엌 등이 마당을 감싸고 있었다. 마당에는 아마 우물이 있었던 자리를 메운 듯한 자리에 수도가 설치 돼 있었다. 아직 추운 날씨에 얼지 말라고 수도물을 약하게 틀어놓아 수도가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는 오래된 마루 위 살강에는 손님들을 대접하던 다양한 형태의 소반이 여러 개 놓여 있어 이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화장실이 문을 열고 나간 집 뒤쪽에 있고 침대도 없는 작은 옛날 방에 이불을 펴고 자야 했지만 3백 년이 훌쩍 넘는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또 다른 정취를 안겨 주었다.     
             

▲ 만죽재의 마루 ⓒ 미전

밤새 봄비 치고는 세찬 비가 내렸다. 빗소리는 마치 ASMR처럼 밤새 지붕을 두드렸다.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150미터 외나무다리를 혼자 걷는 호사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 다시 외나무다리로 향했다. 강변에는 물안개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간혹 왜가리를 비롯한 새들이 날아올라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아마 '고향'이라는 단어에 막연하게 떠올리는 풍경이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었다.      
             

▲ 물안개내려앉은 새벽의 외나무다리 ⓒ 미전


바로 밑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150미터의 외나무다리는 어제 한번 건너본 덕에 내딛는 걸음이 훨씬 수월했다. 외나무다리 옆으로 강물은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지만 물 위를 건넌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 건너면 긴장을 하게 된다. 주말에 오면 줄을 서서 다리를 건넌다고 하는데, 평일에 온 덕분에 전세라도 낸 듯 홀로 정취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다리 중간에 놓인 받침목 ⓒ 미전


양쪽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어떻게 될까? 다리 중간중간에 나무를 덧대 다소 넓은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비켜설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이다. 오랫동안 그곳에 서서 강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맑은 강물이 모래를 쓸어가며 내는 소리는 자연의 아름다운 연주곡이었다. 그 소리를 담아가서 잠이 안 올 때마다 듣고 싶었다.     
             

▲ 내성천에 비친 모습, 모래를 쓸어 안고 흘러가는 물소리가 아름답다 ⓒ 미전


 자연제방이 형성된 내성천 주변에는 왕버드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왕버드나무는 아직 앙상한 가지였지만 아주 연한 풀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마치 자연의 화가가 막 붓을 잡고 첫 붓칠을 한 듯한 엷은 색이었다. 이제 곧 나뭇잎은 하루하루 짙어져 갈 것이다.

4대강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 풍경도 사라질 뻔했다고 하는데, 제발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리석은 일들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 번 사라지면 인간의 손길로는 절 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자연의 풍경이지 않은가!
             

▲ 강변으로 형성된 자연 제방에는 왕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 미전


무섬마을이 기대한 만큼의 풍경이어서 좋았다. 봄빛이 짙어졌을 때, 강물에 첨벙첨벙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여름에, 단풍 아름다운 가을에 다시 한번 들러봐야겠다. 마음의 위로를 주는 공간을 또 한 곳 알게 됐다는 뿌듯함, 도시에서 자라 제대로 된 고향 풍경을 떠올릴 수 없는 나에게 '마음의 고향'이 또 한 곳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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