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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Jul 19. 2020

고독한 젖가슴 이야기

불안의 랩소디

'고독한 가슴'이라 쓰면 고독한 '마음', 외로운 '심정'으로 이해할 거 같아 '고독한 젖가슴'이라 적습니다.



집값에 저당 잡힌 행복은 누가 보상해주나.


서울 아파트 값은 너무 비싸다. 사치는 부리지 못해도 커피 한잔에 삼겹살 먹을 정도는 버는 것 같은데 집값만 생각하면 월급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종종 맛집도 가고, 좋아하는 축구도 하고, 작은 돈이지만 기부도 할 수 있는 만큼의 돈. 생활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싶다가도 아파트 가격만 생각하면 월급은 어느새 '쥐꼬리' 신세가 되어버린다. 쥐꼬리 같은 월급, 쥐꼬리 만한 연봉, '회사원은 다 그런 거지'라는 푸념까지.


노동 시장에서의 나의 상품성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는지, 아니면 직원보다 이익이 우선인 기업의 생리를 탓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돈이 돈을 버는 게 삶의 진리인 양 가르치는 시대를 탓해야 하는지, 마음먹고 불평하자면 불만스러운 건 지만 분명한 건 집값 때문에, 거주 안정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오늘의 삶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불안


불안이라는 녀석과 가장 친밀했던 때는 삼수생 시절이었다. 재수 삼수를 학원에 다니지 않고 도서관에서 했다. 다행히 재수 때는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삼수를 시작할 때는 그마저도 없었다. 함께 했던 친구가 떠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1월의 겨울, 내게 남은 건 불안과 고독뿐이었다. 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 마음 나눌 사람이 없는 외로움 나면 마음 찾아와 다.


그걸 견디기 위해선 몰입할 게 필요했다. 공부야 당연히 하는 거였지만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도 잡념을 없애줄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게 나에게는 운동이었다. 그때는 아침 8시에서 밤 10시까지 도서관에 있었는데 오후 12시에서 1시, 저녁 6시에서 7시에는 식사를 하고 운동을 했다. 공원을 산책하다 우연히 평행봉에 오른 게 계기였다.


평행봉에 올라 처음으로 몸을 내렸다 올리는 운동을 했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공원에서 하는 동작 보고 따라한 것이다. 안간힘을 써도 한 개 두 개 밖에 할 수 없었지만 막상 해보고 나니, 이 운동을 하면 어깨가 넓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키가 작고, 머리 통이 크고, 어깨가 좁다는 3가지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어좁이'는 탈출할 수 있겠다는 느낌든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콤플렉스는 무력감을 주지만 극복할 수 있는 콤플렉스는 열정을 불러온다. 키는 늘릴 수 없고 머리통도 줄일 수 없지만 그래도 좁은 어깨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생각 들었다. 평행봉을 하고 뻐근해진 어깨의 통각, 그 통증에는 넓어질 어깨에 대한 희망 있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했다.




겨울 해 일찍 졌고 어두워진 저녁, 그날도 밥을 먹고 운동을 하러 갔다. 하지만 공원의 철봉에는 새로 칠한 페인트가 발려 있었고,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상태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운동은 해야겠기에, 정확히 말하면 쉬는 시간을 편한 마음으로 보낼 방법이 없었기에, 옆에 있는 중학교로 걸음을 돌렸다. 학교 운동장에도 평행봉이 있다는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패딩에 달린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걸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MP3에는 Queen의 노래가 흘렀다. 친구가 보내준 음원이었는데 그들이 옛날 가수라는 건 몇 년이 지나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겨울철 해진 저녁의 학교는 적막했다. 꺼진 불빛에 내려앉은 어둠, 철문은 굳게 닫혀 운동장에는 쪽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텅 빈 그곳엔 겨울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뒤집어쓴 모자도, 귀에 꽂은 이어폰도 그대로 둔 채, 모래사장이 있는 운동장 구석에서 철봉을 시작했다.


한 세트를 하고 쉬고 있는데


'참 외롭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미팅도 하고, 엠티에 해외여행까지 가고 있는데, 나는 겨울밤 껌껌해진 중학교 운동장에서 평행봉을 하고 있었다. 자칫 떨어져 다쳐도 누구도  그곳에서, 털모자를 뒤집어쓴 채 막연한 불안을 견뎌내고 있었다.


재수를 마치고 만 친구는 요새는 문자 대신 카카오톡이라는 걸 쓴다고 했다.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어 가던 시기였는데, 친구는 나에게 요즘은 카톡으로 연락을 하는 거라고 누가 문자를 하냐고 놀렸다.


누. 가. 요. 새. 문. 자. 를. 해.


세상은 바뀌어 가는 데 내 시간은 그대로 머물러 있구나, 그렇게 나의 20살과 21살은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마치고 학교를 나와 도서관으로 가는데 걸음걸음이 무거웠다. 작년에도 걸었던 이 거리, 성과 없이 보낸 1년과 다시 시작된 1년, 잘할 수 있을까,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서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갈 곳은 없었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했고, 그것만이 답이었다. 그렇게 매일 도서관을 찾았고, 그렇게 매일 평행봉을 했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불안도 외로움도 나름의 규칙성을 가지고 찾아온다는 걸 알 수 있다. 주기적인 불안과 주기적인 외로움, 그걸 깨달아갈 쯤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다시 수능을 치를 때가  것이다.


다행히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욕심만큼은 아니었지만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정도면 됐지 싶었다.  이상은 나의 지적 능력이나 공부 방법의 한계라는 것을 깨달았고, 최선을 다했다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은 바라지 않는 게 좋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삼수를 마치고 얻은 건 대학 진학과 더불어 커져버린 젖가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평행봉에서 했던 딥스라는 운동은 상체 근육 중 대흉근, 그러니까 가슴 근육을 위한 운동이었다. 어깨도 넓어지고 있었지만 어깨보다 가슴 근육이 훨씬 발달해버린 것이다. 매일 한 시간씩 그 운동만 1년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가슴이 왜 이렇게 크냐며 담 섞인 놀람으로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그냥 하며 웃어버리지만, 이 가슴은 타고난 가슴도 아니고 몸짱이 되려고 억지로 만든 가슴도 아니었다. 삼수라는 불안과 혼자라는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 점심 저녁으로 평행봉에 오른 내 젊은 날의 훈장이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공부까지 실패할 것 같았고,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라는 절박함이 만들어낸 가슴이라는 것이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고, 평행봉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커져버린 젖가슴은  몸의 일부, 내 삶의 일부가 되다.




지난 일요일 오랜만에 약속 없는 주말을 맞아 룰루랄라 산책을 나왔는데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 행복해라~'


라고 하면


'여기서 뭘 더?'


라고 할 만큼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요즘이지만 마음 한편에 찾아온 불안으로 울적해진 것이다.


서울에서 살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해, 글 쓰는 시간을 줄이고 재테크를 공부해야 해, 라는 불안이 요즘은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또래 직장인들은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재테크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나는 글쓴다는 핑계로 그런 일들은 등한시하고 있지않은지, 저축이야 성실하게 하고 있지만 월급만으로는 부족한 게 서울살이고, 열정을 가지고 자산을 늘려가려는 사람들에 비해 글쓰기에 몰입하는 지금이 어쩌면 너무 현실감 없는 생활이 아닌가 싶었다.


누. 가. 요. 새. 글. 을. 써.


라며 현실에서 저만치 벗어나 살고 있지 않냐 하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서울 집 값을 탓해보기도 했고, 적어 보이는 월급을 탓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불안을 떨칠 수 없는 인생에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매일 평행봉을 하고 매일 공부를 했던 나, 그런 나의 꾸준함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 나를 위로하고, 내 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 글을 쓰고 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글로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어도, 내 글이 내 생계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엄마는 그런 나에


'돈 보고 하지 말아라'라고 하셨고


아빠는


'무리하지 라'


라고 하셨다. 환갑을 넘들의 깊이담긴 조언이고 그런 분들의 아들인 게 감사하서도, 여전히 어린 나는 내가 쓰는 글로 돈도 벌고 싶고 무리를 해서라도 매일 글을 쓰고 싶다.


삼수했던 21살, 그 후로 10년이 지난 지금, 나이도, 처한 상황도, 감의 깊이도 달라졌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은 여전히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이제달라'라고 말할 게 있다면, 그것은 불안을 대하는 태도이지 싶다.


때때로 불안이 찾아오면 그와 함께 했던 10년 전의 매일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상징처럼 남은 두 가슴을 믿고, 거기에 담긴 어린 날의 열정을 기억하려 한다. 불안한 삶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고독과 불안으로 만든 가슴 두 짝 밖에 없고, 그걸 믿고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말이다. 그게 나를 위한 재테크고 불안한 삶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그렇게 믿보려 한다.







<그날>

           곽효환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 평행봉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rlawnsgh9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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