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이별은 외할머니와의 이별이었다. 충남 공주의 사랑스러운 주택가에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걸어서 100m 밖에 안 되는 곳에 우리 집이 있었지만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나는 유아 시절 대부분을 할머니 집에서 보냈다. 면도기로 머리를 밀어주는 삼촌과 함께 가끔은 큰 이모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누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 댁에 맡기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룰루랄라 유치원에 다니던 나는 꽃피는 6살이었다. 인생의 전성기였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나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서울로 떠날 때 나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나 없으면 슬퍼서 어떻게 살아?"
고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 생신 자리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타박하며 들려주신 얘기다.
"세경이 너는 공주 떠날 때 그렇게 얘기하더니 왜 전화 한 통이 없냐, 할머니가 서운해한다"
나는 애였고 누구도 나에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라고, 그러지 않기 위해선 꾸준히 연락해야 된다고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조금은 억울했지만 보다 많이 죄송했고 이후로는 전화를 자주 드렸다.
요새 생각해보면 나는 할머니가 슬플까 봐 저렇게 말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내 속마음은 사실 '할머니, 나 없으면 슬퍼서 어떻게 살아?'가 아니라 '할머니, 할머니 없으면 나는 슬퍼서 어떻게 살아?' 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이별을 배웠고 어느새 다섯 배를 더 살아 30대가 되었다. 강산이 3번 바뀔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별에 둔감해졌다는 것이다. 가수 김광석은 틀린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른 즈음이 되니까 가슴은 비어 가고 청춘은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친구 아버지께서는 너희 나이는 정말 좋은 나이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도 맞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 많이 젊다.
하지만 내 인생에 10대와 20대는 이미 지나갔고 어제를 살지 못하는 나는 당시에 내 마음을 채우던 수많은 감정들과 이별하며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이를 떠나보냈고 그렇게 채워진 마음들이었다.
영원할 거란 착각도 했었다. 벚꽃 핀 교정으로 기억하는 고등학교 때 처럼 평생 그렇게 행복할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면 무덤 옆 자리 까지 함께 할 줄 알았고 핸드폰에 연락처가 쌓여갈수록 그 숫자만큼 응원을 주고받으며 살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며
"공부만 해도 좋을 나이야"
라며 돌아갈 수 없는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옆 자리에 묻힐 누군가는 다시 찾아야 했고 저장된 연락처 1507개 중에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남았다.
'응답하라 1988'의 후반부도 이별의 연속이다. 공군 장교로 임관한 류준열은 집을 떠나고 아들을 떠나보내는 라미란은 비어버린 아들 방을 보며 한숨 쉰다. 수다로 가득 찼던 쌍문동 골목에는 어느새 철거 딱지가 붙는다.
스물몇 살의 내가 고등학교에놀러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염없이 울었던 이유도 쌍문동 골목을 그리워할 누군가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어제 친구 녀석이랑 저녁을 먹고 우리 집에서 잤다. 병맥주도 마시고 무심한 듯 속 얘기도 잠깐 했다. <세상의 끝까지 21일>이라는 영화를 보던 중, 흐르는 침을 닦다가 잠에 들었고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같이 축구 동호회에 나갔다.
집에 돌아와 맥주병을 치우고 친구가 잤던 이불을 정리하면서 이런 시간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싶었다. 가족이 생기고 자식을 낳고 각자의 생활에 충실해야 할 언젠가가 얼마 남지 않았겠지 싶었다. 10대를 그리워하고 20대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30대인 지금을'그때는 참 좋았지' 하며그리워할 순간이 오겠지 싶었다.
마흔 즈음에도 오십 즈음에도 나는 이별한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10년 후에 내가 그리워할 '행복한 지금'을 많이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정말로 세상과 안녕할 때에 '이 정도면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입꼬리 올리며 잠들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서른 즈음에,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는 그리워할 많은 것들을 채워가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