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이다. '만엔'이란 일본의 연호 중 하나로 1860~61년을 뜻한다.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염세주의자 형과 자기 파괴 욕구로 방황하는 행동파 동생이 등장한다. 만엔 시대에 고향에서 선조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들은 반추하고 추적한다. 그 시대가 남긴 의미와 세대가 지난 전후 시대(1960년대)의 삶을 비교하고 곱씹는다.
소설의 분위기는 고향 분지를 뒤덮은 눈처럼 차갑고 무겁다. 형은 죽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서 방황한다. 형의 아내는 알코올 중독이고 남편의 동생과 성관계를 맺는다. 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개인의 한계를 느꼈다. 정치 체제와 전쟁 앞에서 보통의 윤리와 개인의 정신, 공동체의 연대는 얼마나 무색한가. 파괴된 평화 속에서 개인이 생존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죽는 게 나은지 사는 게 나은지, 방관하는 게 나은지 참여하는 게 나은지,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방관은 무력하지만 참여는 폭력을 동반한다. 사는 건 비참하지만 죽음은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
이렇게 해도 문제고 저렇게 해도 문제면, 진짜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회에 있다. 너비는 한 평이고 높이는 일 미터인 방에 다섯 명이 갇혀 있다고 가정하자. 일어설 수도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몸을 왼쪽으로 뻗으면 왼쪽 사람이 괴롭고 오른쪽으로 뻗으면 오른쪽 사람이 괴롭다. 가만히 있으면 내가 괴롭다. 괴로운 건 모두 마찬가지다. 가만히 있어야 할까, 움직여야 할까. 앉아 있어야 할까, 허리를 펴야 할까. 역사의 무게 앞에 평범한 개인은 무력하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그건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살아간다는 생의 에너지 그 자체다. 물론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보지 않고 먼저 포기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래도 사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응원이다. 지하에서 나온 형은 동생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다시 미래를 그린다. 그게 그에게는 삶이고 한줄기 희망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