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친했던 선배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5년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개천에서 용이 나길 바라는 집안의 누나 많은 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 어렵다는, 나라에서 하는 어느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그 남자는 시험에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아깝게 떨어졌고 온집안 식구의 이목이 집중됐던 상황에서의 실패에 남자는 면목이 없고 후회막심했고 피폐해졌다. 코너에 몰리면 핑계를 찾고 싶어지는 것인지 남자는 선배 언니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내가 연애나 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라고 했다. 여자친구 때문에 시간 뺏기고 집중도 못해서 시험에 결국 떨어진 사람처럼 선배 언니에게 온갖 원망을 쏟아내며 붙잡는 언니를 끝끝내 뿌리치고 매몰차게 멀어져 갔다. 선배 언니는 너무 많이 힘들어했다. 사실 그 언니가 공부를 방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배려하느라 변변한 데이트 한 번 못해 보고 언제나 기다리고 남자가 만나자고 할 때만 만났지 만남을 강요하거나 감정을 자극하거나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차단했다. 선배 언니는 며칠을 눈물로 지새우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을 발견했다. 생리할 날짜가 2주나 지나있었던 것이다. 선배 언니는 남의 눈을 피해 몰래 임신테스트기 세 개를 샀다.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해야 된다는 설명서의 안내를 읽고 선배 언니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떨리는 심정으로 확인한 테스트기는 세 개 모두 두 줄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선배 언니는 절망적인 심정이 됐다. 하지만 한편으론 남자를 다시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머리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것이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꿈꾸던 일, 도전해 보고 싶던 일 다 유예하고 아직 1년 이상 남은 대학 과정을 중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빌미로 남자에게 다시 손을 내밀고 싶었던 것이다. 둘이서 같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원했거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돼 버렸으니까. 생명 운운하며 매달리면 다시 봐 줄까.
남자는 비웃었다. 이미 끝난 사이에 왜 이러냐고 했다. 막말로 누구 앤지 어찌 아냐고 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선배 언니는 절대로 그런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대담하게 하룻밤의 쾌락을 위해 신의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된 기다림으로 인해 지친 마음이 가득했더라도 갑작스레 헤어짐을 통보 받고 깜깜한 마음에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일탈을 순간적으로나마 꿈꿨더라도 차마 실행에 옮겨 끝내 임신까지 하고는 뻔뻔하게 네 아이다 하고 찾아올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5년을 만난 사이였다. 서로의 서툰 처음을 나눈 사이였다. 선배 언니는 지고지순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외면하고 싶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나오는데 네가 어쩔 건데 하는 마음이었다. 선배 언니가 알아서 떨어져나가기를 자기 몸이니 자기가 잘 처리해서 이젠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핑계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식었던 것이다.
선배 언니는 절박한 마음에 남자의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같이 여러 번 밥도 먹은 사이였던 것이다. 남자의 집에 놀러 가면 늦었는데 자고 가라고 손을 잡아끌던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선배 언니가 너무 순진했다.
"에휴.. 마음이 떠났다는데 어쩌겠니? 임신 얘기는... 일단 우리애하고 얘기를 해 보고 연락하마."
그러고는 소식이 없었고 더이상 연락도 닿지 않았다. 선배 언니는 집에서 일부러 30분 가량 떨어져 있는 구석진 동네의 외관이 오래되고 규모가 작은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두꺼운 안경을 쓴 나이든 간호사는 수납대에서 안경 너머로 선배 언니의 앳된 얼굴을 힐끗 보더니 대충 각이 나온다는 표정으로 보호자와 함께 와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꼭 애아빠가 아니어도 되지만 수술 후 누군가가 대동해서 퇴원해야 된다고. 누군가를 데리고 모레 10시에 오라고 했다. 40만원을 준비해서. '현금가'라고 알려주었다. 선배 언니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곳을 나왔다.
선배 언니는 남자에게 여러 번 연락했다. 전화나 문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메일도 쓰고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남자의 친한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나한테 연락 좀 하라고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선배 언니는 학원비와 토익 접수비 명목으로 부모님께 받은 돈을 탈탈 털고 가장 친한 친구한테 어렵사리 털어놓고 병원에 수술을 받으러 갔다. 주사를 맞고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숫자를 세는 동안 정신이 몽롱해졌다. 지지대에 맞춰 다리를 한껏 벌리고 그 삭막한 병원의 얇은 커튼 뒤에 누워있는 자신이 굴욕스럽고 서글펐다. 정신이 다시 들었을 때는 수술이 끝난 후였다. 배가 약간 아팠고 기운이 없었고 무엇보다 몸에서 뭔가가 결국은 떨어져나가 버렸다는 것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허무하고 슬펐다. 같이 와 준 친구는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 주고 싶은데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한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선배 언니는 그렇게 병원 입구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선배 언니는 한동안 의기소침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채 세월만 보냈다. 수술 후부터 항상 어디가 아팠다. 허리가 아프고 어깨도 결리고. 몸이 안 좋으니 어떤 일에도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마음같아서는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늘 몸이 아팠고 쉽게 지쳤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남자를 그리워하던 선배 언니는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문득 내 생각이 날 때도 있겠지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에 마음을 기댄 채 그렇게 하릴없이 숨만 쉬며 살았다. 전공 공부도 게을리했고 열성이던 영어 공부도 손에서 놓았다. 취업 준비는 요원해져 갔다. 선배 언니의 무기력은 급기야 부모님께도 전해져 병원에서 종합검진까지 받아 보았지만 별 특이사항은 없었다. 어느 날, 선배 언니를 염려스러워하던 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두 시간 동안 시외버스를 타고 어느 소도시의 외곽 야산 아래 있던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선배언니가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아이고, 어매라고 그리 떠억 올라앉아 있능교? 그라믄 안되제. 노엽더라도 인자 갈 길 가야제! 사는 곳이 다른디 인자 마 놔주고 갈 길 가소."
쪽진 머리에 진한 화장을 하고 붉은 옷을 입고 있던 그 젊은 무당은 선배 언니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며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아기 귀신 하나가 선배 언니의 어깨 위에 무등을 타듯이 올라타 있다는 거였다. 한이 깊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 앉아 선배 언니가 어디를 가든지 꼭 붙어 있다고 했다. 세상의 빛을 보고 싶어했던 아기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목이나 어깨, 허리가 안 좋지 않냐고 선배 언니한테 물었다. 계속 저렇게 올라타서 다니면 만성 피로는 물론이고 척추에도 무리가 가고 결국에는 건강상에 큰 문제가 올 거라고 했다.
"얼라를 지웠구만?" 이라고 선배 언니한테 말했다고 한다.
영가 천도를 해야 된다고 했다.
충격과 두려움으로 얼떨떨해 있던 언니는 정신을 차리고 이 무당이 굿을 권유하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는 거라고 치부하려 했다.
그러나 무당은 뜻밖에도 굿을 권유하는 대신 사찰 세 군데를 알려 주며 태아령 천도를 하는 곳이니 그 중 한 절에 가서 초 하나 밝히고 진심을 다해 위로해 주라고 했다.
마음이 복잡해진 채 그곳을 나와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연결된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생각에 잠긴 채 걷느라 못볼 뻔했던 그 익숙한 뒤통수는 선배 언니를 기어코 차버리고 갔던 전남친이었다. 무당한테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해서 못본 척하고 피해가려고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지나치려고 하던 중 전남친이 여자화장실 쪽에서 나오던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고는 이내 둘이 허리를 반쯤 포옹한 자세로 버스 타는 곳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 선배 언니가 괴로움 속에 병원에 갔을 때 동행해 주었던 친구였다. 순간 얼음이 되어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돌아와 여러 곳에 전화를 돌려 알아낸 것은 선배언니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허탈하게 만들었다.
남자가 선배 언니에게 매몰차게 헤어지자고 말할 때 그가 내세운 이유는 자기에게 너무 중요했던 시험에 불합격해서 절망적이고 공부에만 집중했어야 했을 시기 연애까지 하느라 공부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건 아닌지 후회가 되고 이렇게 되고 보니 다 허무한데 그래도 포기하기보다는 완전히 새롭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또 도전해 보고 싶어서 라고 했다. 남자가 시험 공부한다고 연락도 잘 안되고 자기한테 온갖 짜증을 내며 까칠하게 굴 때도 묵묵히 곁을 지켰으며 수험생 남친에게 좋은 거 먹이고 싶어서 늦은 시각까지 알바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도 들었으나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당장 내 마음 아픈 것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장래를 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배 언니는 알게 되었다. 남자는 시험에 합격했었다는 걸. 선배언니에게만 불합격했다고 말했다는 걸. 합격 후 축배를 언니의 친구와 들었다는 걸.
그즈음 태동하던 소셜미디어를 통해 둘의 행복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서빙하시는 분들이 끓고 있는 돌솥이 몇 개나 올려져 있는 큰 쟁반을 머리 위로 위험스레 나르는 붐비고 허름한 식당에서 등받이가 없는 딱딱하고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몇 천원짜리 국밥을 호호 식혀서 마주보고 먹을 때도 선배 언니는 행복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저 사람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건 다 거짓이었을까. 그 시간 동안에도 저 사람은 이제나 저제나 어떻게 헤어질까만 궁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혼잣말로 내뱉는 소리까지도 일일이 다 기억해 두었다가 열심히 알바한 돈으로 사다가 짜잔 하고 내미는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여자 하나 고달픈 수험생 생활 속에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일까. 성에 차진 않지만 없어지면 아쉬운 존재였을까. 남자와 선배 언니의 친구는 소셜미디어 속에서 커플 아이템을 하나씩 장착하고 근사한 식당, 유행하는 디저트 가게 같은 곳에서 티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결혼을 준비 중이었다. 예물을 보러 다니고 드레스 피팅을 가고 가전 가구를 사러 다니는 일련의 과정들은 소셜미디어에 빼곡히 기록되어 선배 언니를 괴롭혔다. 얼마나 오랫동안 속여 왔던 것일까. 이 모든 게 그저 급격히 스파크가 튀어 일사천리로 하루 아침에 진행되는 게 아닐 텐데. 바보 같이 뭐가 그렇게 급한 건데 라는 소심한 원망도 혼자 내뱉곤 했다. 선배 언니는 사찰 한 군데를 골라 마음으로 아기를 떠나 보냈다. 꾸역꾸역 학교를 다녀 겨우 졸업하고 아기를 보냈던 사찰이 있는 도시로 가서 그곳에서 작은 카페를 열었다. 앉아서 먹을 곳은 없이 거리를 향해 창 하나를 내고 그곳을 통해 포장만 팔 수 있는 영세한 곳이었지만 언니는 열심히 일했다. 주말이면 절에 올라가 아이한테 인사를 건넸다. 단조로운 삶이었지만 원래 살던 도시에서는 또다시 뒤통수 치는 인간들을 만날까 봐 거리에서조차 마음이 안 놓였던 것이다. 그 둘뿐만 아니라 남자의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다 역겹고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쓸고 닦고 새 음료를 개발하고 간단한 토스트와 호두빵도 같이 파는 동안 선배 언니의 작은 카페는 날로 번창해서 원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8평짜리 가게를 임대해 새로 간판을 달고 새하얀 블라인드도 달고 민트색, 분홍색, 노란색으로 쨍하게 칠해진 철제 가든 테이블과 의자도 테라스에 내놓고 시즌별 디저트도 함께 파는 곳이 되었다.
언니는 잠잠하고 부지런히 살았다. 그러는 동안 언니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언니의 아기가 잠들어 있는 사찰에서 몇 번인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었다. 풍경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어느 적막한 일요일 오후에 둘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봤던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듯이 삶에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에게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진심을 기다렸다는 듯이 털어놓게도 되듯이 둘은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쏟아내고 그 일을 계기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잘 믿지 못하던 언니를 안심하게 해 줬다. 남자는 그 도시가 고향이었고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해 홀어머니가 애를 써서 그를 키워 결국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게 됐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생전 어머니가 자주 오셨던 그 절을 혼자 찾는다는 거였다.
둘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남자의 직장이 있고 선배 언니가 대학을 다녔던 도시로 와 행복하게 살았고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즈음 카페 하나를 인수해서 언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 때 친구들과 연락이 닿아 들은 바로는 언니를 차버리고 갔던 남자와 그 아내는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문제는 남자 쪽에 있었고 임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확률이 희박하다고 했다. 아들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남자의 엄마는 며느리에게
“네 탓이지, 쟤가 그전 샥시하고는 임신이 됐었다니까!”
라는 막말을 했고 부부 사이는 냉랭해져 결국은 이혼을 했다고 한다. 언니의 뒤통수를 때리고 남자를 채갔던 그 친구는 어느 날 언니 카페에 알바 면접을 보러 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