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악몽을 꾸게 됐다. 이를테면 죽은 개에게 물리는.
같이 일하고 있는 비영리법인에 2차 캠페인을 제안하고 승인을 받았다. 2차라고는 하지만 사실 규모를 키우기 위해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뭘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러나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던 것이 주효했다. 그렇게 20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고, 5개의 팀이 꾸려졌다. 시작하자마자 5일 만에 약 1만 7천 불 (약 2천만 원)을 모았다. 1차 캠페인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으쌰 으쌰, 하고 일을 하니 굉장한 속도가 났다. 게다가 모두 실리콘밸리에서 잘 나가는 글로벌 기업 아니면 스타텁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 하루하루 감탄할 때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술자리에서만 알던 사람들도 갑자기 프로페셔널하게 돌변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게 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술자리에선 그렇게 허술하더니, 반전 매력이 뿜뿜이었다. 팀별 미팅이 일주일에 한 번 있었고 전체 미팅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모든 미팅에 참여했기 때문에 본업보다 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아직 shelter-in-place (자택 격리) 시기였기 때문에 모든 회의를 화상통화로 했지만, 일은 생각보다 척척 진행됐다. LinkedIn, Twitter 그리고 각종 스타텁에서 일하고 있는 7명의 엔지니어와 Facebook의 디자이너, Google의 프로덕트 매니저들이 모여서 애초에 계획했던 자동화 플랫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수작업이 많은 업무를 자동화 해 레스토랑과 병원, 노인 복지 센터 등을 알고리즘을 통해 연결해 주는 기술이다.
기업으로부터 직접 기부를 받거나 매칭 기부(직원이 기부한 금액만큼 기업이 매칭해 기부하는 시스템)를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회사로 뿔뿔이 흩어진 옛 동료들에게도 오랜만에 연락할 구실이 생겼다. 돈을 꿔 달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을 홍보해달라는 이유였기 때문에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었고 대화도 어색하지 않고 좋은 분위기로 흘렀다. 물론 소액일지라도 알아서들 척척 기부도 해줬다. 그렇게 옛 동료들의 힘을 빌어 Google, Apple, Netflix, LinkedIn 등의 굴지의 회사 매칭 프로그램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몇 천 불씩 들어왔다.
그렇게 열흘 만에 누적 5만 불 (약 6천만 원)을 돌파했다. 배달한 도시락만 해도 1,200개가 넘었다. 당시 1만 4천 불 정도 썼으니, 아직 3만 6천 불이 남아 있었다. 병원 종사자뿐 아니라 노인 및 소외계층에게도 도시락 배달을 시작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었던 한 비영리법인으로부터 충격적이고 가슴을 쓸어내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COVID-19으로 직장을 잃고 자살을 시도한 노인을 구하게 된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 기도 순간에 때마침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도시락 배달이 사실 단순한 도시락 이상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2차 캠페인은 한 마디로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2차 캠페인이 잘 나가니 이제 마음이 편해질 때도 됐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고민이 시작됐다. 잠을 설치는 일도 생겼다. 무엇보다도 '남에게 받은 돈'이라는 무게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집에 도둑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적도 있었다. 사업을 위한 투자금은 동반자의 성격이 있지만, 좋은 일에 쓰라고 내어 준 기부금은 느낌이 달랐다. 나와 팀을 믿고 선뜻 내어 준 남의 돈은 빚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제대로 갚지 못하면 사회인으로서의 신뢰를 잃게 되는. 돈을 갚지 못해 손가락을 잃는 것보다 어쩌면 더 무서운 일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둘 다 무섭다)
일이 잘 되니 오히려 빚이 더 쌓이는 모순이 있었다. NPO (비영리법인)라도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시작한 건 이때쯤이었다. 아마, 방금 차에 치어 죽어있던 하얗고 커다란 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드는 꿈을 꾼 날 즈음이었을 거다.
비영리법인을 설립하면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우선 미국 전역, 심지어는 글로벌로 빠르게 진출할 수 있는 그림이 바로 그려졌다. 자동화할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토대로 빠르게 확장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로컬 레스토랑에 기부금을 전달하고 그 레스토랑이 음식을 만들어 병원이나 노인에게 전달하는 모델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처음 영감을 준 frontlinefoods.org를 비롯해 Facebook 및 샌프란시스코 시정부까지 모두 생각하고 있었고, 메이저리그 야구팀인 Pittsburgh Pirates가 피자 400판을 병원에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캠페인이 일회성이거나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단체에게 우리의 플랫폼을 제공하고, 그들이 가진 레스토랑 및 병원, 노인 센터 네트워크를 자동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COVID-19이 끝나도 일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었다. 전 세계에 약 8억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있고, 놀랍게도 미국에만도 음식이 필요한 사람이 약 4천만 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아이들이 약 천 5백만 명, 노인이 8백만 명, 그리고 산불이나 홍수 등의 재난이 터졌을 때 활약하는 First Responder (소방관, 의료진 등)들이 약 3백만 명이었다. 이들의 1%에게 하루에 한 끼만 제공해도 일 년에 $2.2B (약 2조 6천억 원)이 필요했다. 미국 적십자사가 일 년에 약 $2.8B (약 3조 3천억 원)을 운용하니, 그렇게 허황된 금액도 아니었다.
생각해 볼수록, 비영리법인을 만들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내가 비영리법인이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실은, 비영리법인은 그동안 나에게 '개혁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의 비영리법인은 비효율의 상징이었고, 투명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을 알 수 없는 깨진 유리 같은 존재였다. 직원들은 쥐꼬리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감성을 팔고, 어떤 높은 분들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부조리의 대명사. 만 원을 기부하면 그중에 실제 얼마가 좋은 일에 쓰이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불투명의 결정체.
물론 몇몇 문제 있는 비영리법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비영리법인 시장만 봐도 뭔가 어색하다. 예를 들어, 전체 $1.6T (약 2천조 원)의 자선단체 지출 중 거의 87%가 겨우 5%의 대규모 자선단체에 집중되어 있다. 나머지 95%의 작은 자선단체가 겨우 13%의 지출을 책임지고 있다. 소기업이 전체 GDP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 For-Profit (영리법인) 시장과 비교된다.
(Source: Urban.org)
사실은 이런 비효율이 안타까워서, 약 3년 전 회사 근처 동네 (East Palo Alto)에 있는 한 작은 비영리법인을 찾아가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회사를 땡땡이치고)
얼마나 필요하세요?
2만 불이에요.
그 돈이 지금 바로 생기면 당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나요?
아, 그럼 당장 전화부터 멈추고 진짜 남을 돕는 일을 해야죠.
하루 종일 펀드레이징을 위해 전화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운영비가 많이 들까 걱정돼 세일즈포스 같은 기업용 소프트웨어는커녕, 액셀도 아니고 노트에 필기하면서 일하던 짠한 모습이 기억 속의 흑백 영상처럼 남아 있다.
비트코인 열풍이 불었을 때, 비영리법인 코인을 만들어 ICO—Initial Coin Offering: 백서를 통해 코인을 공개하고 초기 자금을 모으는 행위. 코인의 가치가 수요와 공급에 맞춰 급격하게 변해, 어떤 면에서는 기업의 IPO와 비슷하다—를 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런 비영리법인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 깊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업이 IPO를 통해 투명하게 운영하고 실적과 미래 가치에 따라 주가로 평가를 받듯, 주식을 발행하지 않는 비영리법인은 대신 ICO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고 일을 잘하면 돈도 많이 벌고 하는 것이다.
비영리법인을 위한 ICO라는 대담한 계획은 결국 무산됐지만, 비영리법인이 가진 구조적인 이중성—투명하지만 투명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지만 배고픈—은 나에겐 오랜 부조리의 대명사이자 '개혁의 대상'이었다. 굳이 열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영리법인을 직접 하겠다는 생각이 잠깐이라도 들다니, 스스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