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개척 정신에서 힌트를 얻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게 성공적이었던 1차 캠페인을 마치고 다음 단계에 대해 생각을 하다 문득 '인기'에 몰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됐다. 아차, 싶어 비밀의 방의 '쌩 자아'와 마주 앉아 솔직한 대화를 나눴고, 결국 이기적인 욕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남을 위한 일이었지만 사실은 남에게 준 것보다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더 많았다. 남을 더 돕고 싶다는 생각은 뭔가 대단한 뜻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저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뿌듯한 마음, 나에 대한 시선,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를 괴롭히던 자괴감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욕망이 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대신, 서로 윈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니, 일을 잘하는 데에만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비영리법인 이사회에 다음 캠페인을 제안할 용기가 생겼다.
우선 지난 1차 캠페인을 통해 배운 것을 돌이켜 봤다.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됐다.
중환자실은 낮 근무조와 철야 근무조로 나뉘는데, 후자는 병원 내 식당이 저녁에 문을 닫는 바람에 실제로 밤새도록 굶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
병원 외에도 독거노인, 취약계층 등이 COVID-19으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었다는 점. (매일 끼니에 도움을 주던 양로원 혹은 동네 hot lunch program 등이 문을 닫은 경우가 허다했다)
기업들도 COVID-19을 위해 따로 예산을 편성해 기부하고 있었다는 점. (특히 사내 이벤트 등으로 편성된 예산을 재택 대피 명령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지역 사회 환원 목적으로 전환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이에 맞춰 2차 캠페인에는 두 가지를 바꿔서 제안하기로 했다.
1) 병원 종사자와 더불어 독거노인 및 소외 계층에게도 캠페인을 확대해 도시락을 배달하고,
2) 개인 기부와 더불어 기업 기부에까지 확대해 기부금을 늘리는 것.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모든 게 (당연히)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이사회에게 다가가서는 1차 캠페인 첫 미팅 때처럼 의외의 냉소적인 반응에 또 식은땀 흘릴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잘 모르는 뭔가를 도모하려고 할 때 가장 조심할 것이 있다. 모르는 것이 많으니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하는 경우와, 그와는 반대로 모르는 것을 열심히 감추다 보니 아예 모르는 것이 없다고 부지불식간에 착각에 빠지는 경우이다. 물론 두 가지의 아주 극단적인 예인데, 정말 신기하게도 두 극단으로 빠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원래 그렇게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가게 되어 있다. 이때 그 두 극단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한데, 이게 또 균형을 잡으려다 보니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대부분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번엔 좀 바꿔보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서부 개척 시대와 닮았다. 왠지 모든 사람들이 날렵한 말에 올라 신나게 채찍을 휘두르며 서쪽을 향해 달려갔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안주하고 망설인 사람들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putting a stake in the ground to claim the property.' 즉, 말뚝을 박아서 '내 땅이다' 하면 정말 내 땅이 되는 것이다. 안주하는 사람들을 독려하고 서부 개척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개념이라고 한다.
(Image Source: history.nd.gov)
이 땅을 팠을 때 금광이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 땅이야'라고 선언부터 하고 보는 거다. 생각해보면, 이 땅에 먼저 살고 있던 토착 인디언들에게는 어이없는 상처가 됐을 수도 있는 참으로 원시적이고 무식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만큼 이제는, 'putting a stake in the ground'라는 표현은 '일단 시작하고 본다'는 뜻에 가깝게 비유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불확실한 것이 많더라도 일단 '그럴 것이다'하고 시작하고 보는 거다. 특히 시작하는데 비용과 위험이 상대적으로 덜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일할 경우, 제품을 개발하거나 할 때 아주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 서부 개척의 종착점이었던 캘리포니아에서 그 서부 개척 정신을 조장한 표현이 많이 사용되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발달했다는 것. 어쩌면 운명이려나.
그런데 이게 나 혼자 하는 일이라면 어렵지 않을 텐데, 그 불확실한 일로 남을 초대하려면 꽤 쉽지 않은 일이 된다. 불확실한데 누가 같이 하려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스스로도 본 적도 없는 금광을 캐러 가자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뚝을 박고 일단 시작하고 보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모르는 것 투성인 불확실한 일을 같이 하자고 설득하기 위해 고민하다 서부 개척 정신에서 힌트를 얻게 됐다. 땅에다가 말뚝을 박아놓고 일단 '이것이 금광이다'라고 선언한 다음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그림을 혼자 그려보고, '그냥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믿어야 했다. 2차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된 일인 것으로 자기 암시를 걸어야 했다.
일단 기업 기부는 보통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려봤다. 구체적인 도표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상상력에 의존한 차트였다. 또 팀은 다섯 개의 별동대로 나누어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각 별동대마다 약 1.5명에서 5명까지 총 15명 정도 필요하다고 만들었다. 당연히 1.5명 등이 필요하다는 것도 역시 상상력의 작품이었다. 1차 캠페인의 광고 CTR (Clickthrough Rate)은 10.9%로 아주 좋았지만 광고를 통해 실제로 우리 사이트까지 오는 경우는 0.07%로 아주 낮았기 때문에 이 conversion을 0.2%대로 높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숙제도 제시했다. 이 역시 사실은 '세 배쯤은 되어야 되지 않겠어?' 하는 상상력에 의존한 구체적인 헛소리였다.
물론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고 대부분이 상상력에 의지한 생각임은 솔직히 밝혔다. 다만 계획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해 이미 시작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모든 성공적인 아이디어의 시작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이런 일방적이고 구체적인 상상은 청자뿐만 아니라 화자마저도 믿음을 키울 수 있게 해 줬다. 즉, 계획이 구체적이면 나도 말하면서 왠지 될 것 같은 느낌이 진심으로 생기는 것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일지라도 구체적이라면 묘한 힘이 실린다.
그렇게 일단 '말뚝을 박아' 놓고 나니, 여러 의견과 피드백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NPO의 흐름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기업 기부를 어떻게 받으면 좋을지 아이디어도 쏟아졌다. 많은 아이디어가 나와 구체적인 사항들이 많이 바뀌었지만, 큰 틀은 유지되었다.
2차 캠페인을 하느냐 마느냐의 논의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처음 이야기를 꺼낸 지 일주일 만에 약 20명의 팀이 꾸려졌다. 기업 기부부터 GoFundMe (비영리 단체 및 개인을 위한 크라우드펀딩 웹사이트) 운영, 홍보 및 커뮤니케이션과 도시락 배달을 위한 파트너십,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래 목적이었던 자동화를 이끌 플랫폼 팀까지. 제법 모양새가 나왔다. 참가하는 사람들의 면면도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링크드인 등의 대기업 직원부터 각종 스타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도전 정신 가득한 인재들까지, 나이도 20대 초반부터 50대까지 그 다양성의 스펙트럼이 상당했다.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했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된 2차 캠페인.
다양한 사람들이 정성을 쏟았던 결과라면 이해될까. 이번엔 단 5일 만에 약 1만 7천 불 (약 2천만 원)이 모였다. 1차 캠페인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2차 캠페인은 총 3주를 계획했으니, 아직 1/3도 안 지난 셈이었다. 일이 정말 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