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아야 할 '백만 가지' 이유
2차 캠페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고, 5일 만에 약 1만 7천 불 (약 2천만 원)이 모였다. 돈이 빨리 모이니 마냥 좋아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잠을 설치거나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좋은 일에 쓰라고 준 남의 돈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얼핏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시끄럽게 벌려놓은 일. 선택지는 많지 않았고 결국, NPO (비영리법인)라도 만들어서 제대로 한 번 해봐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비영리법인이 너무 생소하다는 것이었다. 인생 통틀어 비영리법인의 '비'자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개인적으로 막연한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사실 고민이 많았다. 이때 고민들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비영리법인과는 별도로 이미 일어나고 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난 퇴사 준비 중이었다.
지난가을, 우울증을 겪으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프로덕트로 승화해 사업 모델로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직장인 우울증을 예방할 수 있는 AI 기반 SaaS Product였다. 광고를 돌려 수요에 대한 테스트도 마쳤고—수요에 대한 proxy인 클릭률이 '좋은 광고'의 대체적인 기준인 5%를 훌쩍 넘겨 40%에 육박했다—의료계 및 대학 등의 각종 전문가와 상의해 가설에 대한 검증도 많이 마친 상태였다. 간단한 프로덕트를 회사 내에서 테스트해보고, 사내 해커톤에 나가 상까지 받았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만난 한 사람과 co-founder's agreement에 이제 막 싸인을 마치고 개발을 앞둔 상태였다.
또 그와는 별도로, 예전에 같이 일하던 엔지니어 두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팀에서도 인정받는 유능한 엔지니어들이었고, 나와도 손발이 척척 맞았던 친구들이다. 이미 다른 회사로 이직했거나 다른 팀에 있었는데, COVID-19를 계기로 사업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며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일단 Devpost라는 글로벌 해커톤에 같이 참여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에만 해도 생소했던 COVID-19 확진자 추적 앱이었는데, 확진자와 겹친 동선의 '거리' 보다는 겹친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가설을 토대로 기획한 앱이었다. 콘셉트 자체는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잘 키우면 콘서트, 공공시설, 음식점 등에서 유용하게 쓰일 앱이자 헬스케어 쪽으로 확장할 수 있는 꽤 괜찮은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일을 진행하다 보니 결국, 도시락 배달뿐 아니라 독립을 위한 사업 준비, 전 동료들과의 COVID-19 확진자 추적 앱, 그리고 Facebook에서의 본업까지 '포잡' (4 Jobs)이 되어버렸다. 등 떠밀려 다른 팀을 수동적으로 찾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회사 일 자체는 부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포잡'은 쉽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고 종종 잠이 부족했다. 우울증 AI Product 사업 혹은 헬스케어 앱이 유니콘이 되는 상상을 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영리법인이라니.
무엇보다 난 스스로를 항상 비즈니스맨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비영리법인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솔직히, 유니콘도 키우고 싶고 억만장자가 되어 재단도 운영하고 싶었다. 최소한 그런 꿈을 꾸며 도전하고 싶었다. (배고픈) 비영리법인을 시작하게 되면 전혀 다른 꿈을 꾸어야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예전 직장 동료 중 굉장히 재미있는 친구가 있다. 일단 꿈이 인도의 총리가 되는 것이다. 친구들이 그의 꿈을 비웃자 '내가 뭘 하면 꿈의 진실성을 믿겠는가'라고 되물었고—되묻는 것부터 이미 특이하다—친구들이 '네가 올림픽에 출전하면 믿어준다'라고 해 고심 끝에 펜싱을 시작한 친구다. 인도에 펜싱 인구가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결국 몇 년이 지나 랭킹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친구를 처음 본 날부터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eBay 사무실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친구가 자비를 들여 인도에 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아예 없는 동네가 지천이고, 학교 하나 짓는데 겨우 약 3천 불 소요된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약 3년에 걸쳐 학교 6개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이 친구는 나중에 Apple로 옮겨 갔는데, 옮겨 간 이후에는 아예 살던 집 계약도 끝내 버리고 회사 앞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에서 칩거를 했다. 3천 불 여섯 개면 만 8천 불.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아직 결혼도 안 한 싱글 Apple 엔지니어로서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을 텐데, 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여간 대단한 열정이었다.
(이 친구가 세운 비영리법인의 이름은 O'Bruce이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어느 날 저녁, 이 친구에게 전화를 건 일이 있다. 문득 인생의 의미가 궁금해진 날이었다—야근 중이었다. 나도 이 친구의 학교 짓기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천 불이면 적지 않은 돈이지만 학교를 짓는 의미 있는 일에 쓰일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청 반가워하겠지. 수화기 옆으로 나의 얼굴에 벌써 기대감의 미소가 번졌다.
"AJ, 나도 동참하고 싶어. 뭐 하면 돼? (나도 하겠다니까, 기쁘지? 기쁘지?)"
"왜 하고 싶은데?"
"응? 왜라니, 나도 아이들을 위한 학교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그래? 두 달에 한 번 인도에 올 수는 있고?"
"아, 그건 좀 일정을 봐야 할 것 같아..."
"학교를 하나 세우는 데는 3천 불이 들지만, 운영을 하려면 그 열 배는 들어가. 가장 어려운 일은 전기를 문제없이 공급하는 것과 선생님 수급 및 커리큘럼 퀄리티 관리야. 두 달에 한 번도 사실 부족해."
"..."
"무엇보다도 한 번 시작하면 평생 멈출 수 없어. 학교가 세워졌을 때의 기쁨의 크기보다, 그 학교가 없어졌을 때의 슬픔의 크기가 더 크거든. 그래서 계속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아."
아차, 싶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기쁨의 크기보다 슬픔의 크기가 크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한 없이 무지하고 가벼운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구 반대편 인도에 있는 학교에 기부(나)해볼까, 라니.
"계속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아."
이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증폭되면서 뺨을 세차게 후려 맞은 듯 어질 해졌다. 정신 차려 이 못난 놈아! 이 친구가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아 살짝 서운했던 치기 어린 마음은 부끄러움에 압도 당해 꼬리를 감췄다.
그런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COVID-19로 인해 더욱 부각되기는 했지만, 배고픔이란 것은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캠페인을 통해 돕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갑자기 도움이 필요 없고 괜찮아질 일이 아니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 비영리법인을 만든다면, 대충 하다가 말 그런 일이 아니었다. 멈추려면 아예 시작하지 말아야 할 일. 거꾸로 말하자면,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길과는 너무 다른 길이자, 심지어는 '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생의 한 부분을 정의할 중대한 결정이었다. 평생의 배우자를 찾는 일이라면 비슷하려나. 소개팅 나간 날 만난 사람이 이상형과 딱 반대인데, 분위기가 좀 좋았다고 해서 당장 결혼해 아기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과감한 일이었다. 물론 상대방이 받아줘야 하지만, 어쨌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