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책에 푹 빠지다
푹 빠졌었다.
오랜만에 읽는 한글 책이라 눈에 쏙 들어왔다. 눈과 활자가 만나 손 붙잡고 강강술래를 추듯 신이 났다. 한 권을 읽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아무 책이나 찾아 또 읽었다. 올드보이 최민식이 15년 감금 생활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친 첫 사람, 오광록을 붙잡고 오감으로 빨아 느끼듯.
일주일 간의 추수감사절 휴가. 사정이 있어 여느 때완 달리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물렀지만, 그 가장 따분해야 했던 휴가가 한국 책들로 인해 오히려 가장 설레는 휴가가 됐다.
아내가 어디선가 사온 후 집에 굴러다니던 책이다. 나 같으면 절대 안 살 책 제목이지만, 읽다 보니 수긍하게 되는 점이 꽤 있었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지나가던 마크 저커버그를 보면서, 저 친구가 20대에 했으니, 경험도 있고 에너지도 충분한 40대의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게 그렇게 너무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아니라고 친절하게 속삭여주는 책이다—물론 내 멋대로 해석했을 때.
20대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라는 것이 있다면 40대에 하면 된다.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40대가 설렌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오시면서 읽으려고 사 오신 책이다. 아버지가 하루키라니, 많이 놀랐다. 왠지 표지에 적인 "무장해제시킨"이라는 말 때문에 고르셨을.
하루키식 글쓰기에 대해 특별히 깜짝 놀란 부분은 없었고, 그냥 마음대로 써 지르면 알아서들 숨은 뜻 찾는답시고 난리법석을 떠는 모습이 그려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내 맘이야'에 평론가 등이 떠들썩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목적성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해석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하루키 소설이 전달하는 건 내용보다는 감성이니까.
의외로 고지식한 하루키의 모습이 보여 반가웠다. 여자 친구였다면, 아이구 그랬쪄요, 하고 양볼을 잡아당겼을 것이다.
언제 샀는지, 읽었는지 조차 기억 안 나는 먼지 쌓인 책이었다. '69'의 무라카미 류가 너무 강렬했기에, 소설 속의 아키코가 언제쯤 벗을까 조마조마해가며 읽었다. (결국 소설 말미에 한 줄로 나온다. 같은 침대를 썼다, 고. 그게 뭐냐고. 아무튼 그게 포인트는 아니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소설 끝 부분 딱 한 장에 다 나온다. 심심하면 아버지를 쥐어 패는 희대의 히키코모리 히데끼 (이 개데끼)가 변호사 다사키에게 깨지는 부분이다. 누군가를 구원함으로써 나도 구원받는다는 만연한 상식에 대해 작가는 부정한다. "구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상대를 대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등한 인간관계에는 구하고 싶다는 욕구가 존재할 수 없어요."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이기적이라는 부분은 동감합니다. 그렇다고요.
한국에서 오신 아버지가 당신이 읽기 위해 사 오신 책이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자서전을 한 번 써보시라고 권한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응답이었으리라.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라고 해서 어떤 사람인가 찾아봤더니 도쿄에 고양이 건물 짓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귀를 기울이면'에 목소리 출연도 하는 등 재미있는 이력이 더 눈에 띄었다. 철학과를 중퇴했다는 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면 너무 깔때긴가.
좀 더 철학적으로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자서전 쓰는 기술적인 이야기라, 중간에 관뒀다. 맺음말을 쓰고 머리말을 가장 나중에 쓴다는 건, 내가 책을 써 본 적이 없으니, 신선했다.
언제 어떻게 우리 집 책장에 있게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책이다. 그래서 읽어봤다.
세상 복잡한 고민에 간단하고 명쾌한 답을 주시는 법륜 스님의 책인 만큼 명쾌했다. 깨달음이란 건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없다는 걸 명쾌하게 깨닫고, 그래서 이것도 읽다가 관뒀다. 짧은 책이라 조금만 견디면 다 읽겠지만 다 읽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수행을 계속해야 순간 미혹에 물들었다가도 바로 빠져나와 자기를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다, 는 말씀에서 인간적인 향내가 났다. 이런 큰 스님도 아직도 유혹이 많은 거다. 꼬집혀 상처 난 내 허벅지 따위라고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