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책 추수감사절에 추기 시작한, 오랜만에 만난 한글 활자와의 강강술래는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계속되었다. 사실 이번 연휴에는 미리 계획했던 가족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여행 틈틈이 책을 읽어댔다. 여행 틈틈이 술도 아니고 책이라니, 40년 넘는 인생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렇다고 술의 양이 줄어든 것도 아니니, 나름 '바쁜' 여행이었군.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해변에 반쯤 누워 앉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은 무슨 책이야, 하고 펼친 책 좌우로 실룩거리며 유혹하는 비키니 엉덩이들이 가장 큰 난관이었지만.
<지하철>에 감탄하고 구입한 아사다 지로의 또 다른 책이다. 여러 단편을 묶은 단편집인데 죽음 혹은 눈물이라는 테마로 이어져 있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슬픈, 가슴이 아리다가도 어딘지 모를 촌스러움에 실소를 머금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어느 쪽의 아사다 지로라고 한다면 도저히 알 수 없지만, 굳이 고르자면 야쿠자 출신 아사다 지로보다는 몰락한 부잣집 아들 아사다 지로에 의해 쓰였다는 느낌이다.
가장 인상 깊은 단편은 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영화로도 알려진 <철도원>도, 영화 <파이란>의 원작인 <러브레터>도 아니었다. 실크 새틴 드레스를 입은 고급 부티크 여주인이 나오는 <캬라>였다.
두 경쟁사의 탑 의류 세일즈맨인 '나'와 고타니가 퇴근 후 바에서 마시는 한 잔 술에 감정 이입됐다. 뭔가 과거가 있는 신비로운 여인 타치바나 시즈카에 대해 아주 깊이 알고 싶어 졌다. 도쿄 롯폰기도 아닌 외곽 작은 도시의 한 구석진 가라오케에 들어갔는데, 뜻밖에 세련된 마담을 만난 느낌이다. 원래는 뉴욕에서 행위 예술 디자이너의 꿈을 펼지다 어떤 사정이 생겨 어쩔 수 없이 귀향한.
우아한 몸짓으로 내 옆에 엉덩이부터 앉으며 무슨 노래를 부를 거냐고 묻는다. 게슴츠레 떴지만 깊이 있는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로 골라줘요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답하는 그런 느낌의 소설이었다.
책 추수감사절 때 <수리부엉이는황혼에날아오른다>를 읽고 생긴 호기심으로 구입한 책이다. 호기심의 원천은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호스티스로 일했다거나 (겨우 800장 팔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는 작가의 특이 이력이 아니었다. 그, 입에 착 감기는 뛰어난 어감의 제목도 더더욱 아니었다.
나의 호기심을 가장 크게 자극한 건 작가가 나와 동갑내기라는 부분이었다. 동갑내기라는 것에는 '뿌리치기 어려운 마력'이 있다. 노란 계란이 보글보글 끓는 겨울 라면, 전도연 같이 생긴 여자의 백허그, 아니면 무릎에 난 잔털 정도면 비슷하겠다.
무라카미 류는 "아슬아슬한 곳에서 제어됐다"라고 했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문체였다. 그나마도 권남희 번역가께서 "인간적으로 이쯤에서는 행갈이를 해줘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행갈이도 하고 쉼표도 찍고 해서 나아진 것이라고 한다. 원본은 한 문장이 여러 장에 걸쳐 계속되기도 하고 쉼표도 제멋대로고 따옴표도 중구난방이었다고 한다. 철저히 독자를 무시한 책. 그래서 아쿠타가와 상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었다. 아예 책 한 권을 한 문장으로 이어 봐?
물론 군데군데 번득이는 표현과 리듬이 돋보였지만, 납득은 어려웠다. 적나라한 여자의 가슴 혹은 여탕에 대한 묘사는 자칫 흥미로울 수 있었지만, 이미 '직박구리 폴더'에 담긴 수많은 동영상들에게 그 첫 흥분의 감투를 빼앗긴 후였다. (아저씨는 이래서 안 된다.)
<헤븐>을 읽으면서 오히려 <젖과 알>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됐다. <젖과 알>의 문체는 사실 작가가 의도한,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것이라는 것을, 이 평범(?)한 문체의 같은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납득하게 되었다.
왕따를 당하는 여학생 고지마가 비 오는 날 공원에서 모든 것을 벗어젖히는 부분이 클라이맥스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괴로움이나 슬픔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강인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장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책 속에 삽입된 행위 예술을 숨죽여 감상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소설 속에 등장하지만 실제로도 존재하는 아니 실제로는 더욱 심각할 수 있는 이 왕따의 문제가, 소설에 나온 지극히 소설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아쉬웠다. 물론 현실에 살고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학부형의 한 사람으로서 아쉬웠을 뿐, 소설로서는 어두침침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여성인 작가가 15살 소년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흥미롭다가도, 한편으로는 동갑내기 15살 소녀를 더 쉽게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고차원적인 세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25살 여인을 일인칭으로 한 소설을 한 번 써볼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소설 내내 샤워실 거울만 볼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화제가 많이 되고 제목이 catchy 해서 사 봤다. 잘 다니던 회사를 6년 만에 때려치우고 나와 '내 마음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본 경험에 대해 풀어놓은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하완 작가가 "나 좀 건들지 마"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6년이라면 사회생활의 진정한 쓴 맛과 단 맛을 보기에는 조금 짧은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개인 차가 있으니까.
"우리에게 돈을 주는 자본가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라고 단정하거나 "금수저들과는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해버리는 과감함에 화들짝 놀랐다. 한 가지 뼈대가 책을 관통한다. 바로, 남과의 비교. 책의 메시지를 지지하는 전제이다. 남과의 비교에 맞춰 살다 지치고, 지금의 '내 마음대로의 삶'도 결국 남과 비교했을 때 다른 삶일 뿐이다.
몇몇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난 상관하지 마'라는 식으로 왠지 흐지부지되는 느낌이 아쉬웠다. 어떤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살아왔기에 그런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원래부터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하기 어려우리라.
어떻게 보면 관념론과 경험론의 차이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시간이 배제된 공간과 상태에 집중한 책의 메시지와, 시간과 변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생각이 물과 기름처럼 부자연스럽게 부대꼈다.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내 치마에 스타킹을 입으려고 낑낑대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밖에 관심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하는 카와카미 미에코가 더 편하다. 남들과 비교해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해 내가 어디에 있는가, 가 훨씬 두근거리는 질문이다.
유학생 시절 언젠가, 즉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없는 외톨이 시절에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책이다. 당시에는 <1973년 핀볼>과 같이 붙어 있는 다소 촌스러운 cover의 책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의 숲> 보다 더 마음에 들어, 밥 먹으러 식당에 갈 때도 (읽지도 않을 거면서) 항상 들고 갔다.
어느샌가 쥐가 나타나, "괜찮아, 분명히 말해서 지금의 네가 배부른 부자들 보단 훨씬 낫다고"하고 눈도 안 마주치고 위로해줄 것만 같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책은 잃어버린 터라, 온라인 서점에서 눈에 스친 순간 도저히 구입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다시 읽어 보니,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 하루키가 공개했던 당신의 글쓰기 기술이 조금씩 보였다. 무엇보다도 문답이 살짝 어긋나 있다. 동문 서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아귀가 맞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당사자는 뭔가를 알아들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수긍한다. 이를테면 "여자는 대체 무엇을 먹고 산다고 생각해" "구두 바닥" "설마"하고 이어진다. 동물을 좋아한다고 해 놓고선, 인도 바갈푸르의 표범이 사람을 350명이나 잡아먹어서 영국의 한 대령이 8년 간 표범 125마리를 죽였어. 그래도 동물이 좋아? 하고 상대방에게 되묻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