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삼사일 정도라지만 여행 기간 내내 매일 기름진 음식에 술까지 마시다 보니 배가 불러왔습니다. 겪어보면 압니다. 절대 단기간에 꺼질 배가 아닙니다. 만져보면 탄력이 다르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에펠탑 주변을 뛰기로 했습니다. 아직 잠에 빠져 헤롱대는 아이들에게 핸드폰을 쥐어주고, 아내와 함께 나섰습니다. 목표는 에펠탑 광장 주변 한 바퀴. 약 1.6마일 (2.5킬로미터 정도)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른 아침 조깅이라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평소엔 조깅의 지읒도 거들떠도 안 보는데. 아, 그래서 비현실적인 건가.
리얼리즘 #1
그렇게 상쾌하고 낭만적으로 시작한 조깅은 몇 분도 안돼 극심한 똥냄새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수구 냄새가 역행한 건지 퇴비 냄새인지 모를 강한 냄새에 100미터 달리듯이 뛰다 보니 금세 숨이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똥냄새 지역을 간신히 벗어나니 이번엔 매연이 코를 지나 기관지를 찔러댑니다. 곳곳이 공사 중이라, 에펠탑 광장을 뛴다기보다는 공사장을 뛰다 보니 에펠탑이 나왔다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생각보다 훌륭한 조깅 코스는 아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에펠탑 광장 주변 조깅은 그렇게, 상상과는 달랐던 리얼리즘 조깅이 되었습니다.
리얼리즘 #2
낮에는 루브르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오르세 미술관에 들렀는데, 교과서에서 본 익숙한 작품이 많아 저 같은 문외한도 꽤 즐길 수 있었습니다. 루브르 때 맛 들인 음성안내시스템을 손에 쥐고 구석구석 천천히 살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화가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 - 1877)였습니다. 당시에 대세였던 낭만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는데, 그걸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간판까지 달았다고 합니다.
나는 본 것만 그려. 나에게 천사를 데려다주면 한 번 그려 볼게.
라니. 참 한 성격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실제 인생도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않고 떠돌았던 자유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약간 신해철 형님 느낌도 납니다. 두 분이 하늘에서 베프 먹었을지도.
모든 걸 예쁘고 성스럽게 표현했던 낭만주의 그림과 달리 엄청 사실적이고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대중이 많은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에펠탑 조깅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대중에 충격적인 것은 예술가에게는 매력적인 것. 쿠르베는 19세기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마네나 밀레도 있었으니이를테면 19세기 예술계의 BTS 쯤 되지 않았을까 제 마음대로 추측해봅니다.
낭만주의가 판 치던 시대에, "세상이 다 그렇게 예쁜 건 아니잖아"라고 솔직하게 선언해버린 쿠르베의 용기. "사회성"이라는 굴레를 덮어쓰고 나도 모르게 관성에 의지해 수동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부분은 없었는지 프랑스 한복판 미술관에 앉아 반성하게 됐다는 건 좀 오버지만, 그래도 왠지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쿠르베 아저씨.
리얼리즘 #3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지나다닐 때마다 입맛 다시며 봐온 한 French 레스토랑 (La Fontaine de Mars)에 가기로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레스토랑 밖에 앉아 먹는 걸 좋아해서인지 예약을 안 한 우리는 2층으로 안내되었습니다. 2층이어도 괜찮겠어요?, 라며 웨이터는 우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고 아담하게 이쁜 2층이 우리는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음식은 한 마디로 프랑스다웠습니다. 저는 농어를 시켰는데 매쉬드 포테이토 위에 얹혀 나왔습니다. 감자와 농어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홍합 먹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요리에 감자를 잘 씁니다. 둘째 딸은 "소시지 푸딩"이라는 음식을 시켰는데 그--아홉 살 기준으로 봤을 때--환상적인 두 단어의 조합에 현혹되었던 것. 그러나 결국 이 푸딩이 그 푸딩이 아님을 깨달은 둘째와 농어를 통째로 바꿔 먹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전채로 시킨 소시지 햄 플래터였는데, 이중 한 소시지에서 똥냄새가 났습니다. 먹어보면 맛까지 쌉싸리한게, 이게 똥인지 소시지인지는 먹어봐야 안다는 속담이 나오겠군 싶을 정도였죠. 순간, 요리계의 쿠르베가, 소시지란 내장이므로 응당 이런 맛이어야 한다,라고 만든 리얼리즘 소시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이 더 발전하기 전에 다행히) 똥냄새를 맡으며 금세 정신을 차렸습니다. 나중에는 가족 넷이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꼴등이 먹기로 했는데 가위바위보만 했지 끝내 먹지는 못했습니다.
승자의 환희와 패자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4일 차 여행 일지
저는 Gustave Guillaumet의 그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은 잘 모르니, 최대한 사진처럼 자세하고 정교한 그림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아저씨도 19세기 프랑스 화가인데,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고흐 등 당시에 유명한 화가들이 많이 나온 어떤 시대적 배경이 있을 것 같지만,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반 고흐 왈, "뮤지션들은 베토벤이다 뭐다 남의 곡을 자기 나름대로 잘도 해석하고 연주하면서, 왜 화가들에게는 유독 오리지널리티만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따라 했다, 밀레."
물론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꽤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오페라 하우스는 정말 멋지지만, 사진이 더 멋지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진빨을 잘 받습니다.
오페라 하우스 2층에서 오페라 길을 바라보며 찍었습니다.
오페라 하우스는 4시 반에 끝난다고 했는데, 저희가 도착했을 때 이미 4시 13분쯤 됐습니다. 물어보니 다 보려면 한 시간쯤 걸린다고 하더군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속성으로 보기로 하고 입장했는데, 결국 다섯 시 넘어서까지 여유 있게 구석구석 다 잘 봤습니다.
파르페 디저트까지 신나게 먹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똥냄새 소시지 등등으로 인해 이 좁은 레스토랑에서 저희 가족이 너무 낄낄대고 웃어대는 바람에 좀 걱정이 됐습니다. 아이들과 스스로를 애써 조용히 시켰지만, 웃음은 정말 참기 힘들죠. 옆 테이블에서 저녁식사를 하시던 미국 노부부가 나중에 우리를 따로 붙잡고는, 덕분에 너무 즐거웠다고 말해줘 다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