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성'에 대해
시계를 좋아하거나 마니아는 아니다. 다만 요즘 가끔 킬링타임용으로 유튜브에서 시계리뷰 영상을 종종 보곤 한다. 남자의 본능인지, 그 영롱함에 끌려서 장바구니까지 가져다 놓지만 이내 포기하고, 며칠 뒤 품절이 된 것을 확인하곤 한다. 그러다가 카시오 시계라도 보면 당장이라도 살 것처럼 결제창까지 갔다가 다시 생각을 멈추곤, 지금 있는 지샥시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뒤 뒤로 가기를 누르곤 한다.
이건 요즘의 이야기였지만 이거보다 더 예전에 아마 학생 때, 어떤 시계에 대한 짤이 떠돌았다. 시간이 안 보이는 시계가 2억에 출시되어서 판매 중이고, 브랜드는 이 시계는 시간은 상상하거나 꿈꾸거나 발명하는 거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재밌는 건 무브먼트와 커버등 나머지 모든 것들은 실제 시계와 마찬가지라서, 시간이 안 보인다는 말도 좋지만 '시간을 가렸다.'라는 표현이 좀 더 적절할 것만 같다.
이 설명에 대해 이야기 한 글들은 죄다 납득이 안 간다는 분위기였지만 몇몇 글은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는 조금 더 재미있게, 이 시계의 실용성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실용성이라.. 시계가 시간을 알려줄 수 없는데 무슨 실용성이란 말을 쓰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바로 그게 재미있는 점이라 지금부터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해보고자 한다.
유튜브 시계 리뷰 영상으로 돌아가면, 시계의 여러 가지 기능들을 이야기하고, 더불어 시인성에 대한 이야기도 항상 나온다. 시인성(視認性)이라는 말은 얼마나 시각적인 식별에 있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말이다. 가끔 어떤 시계를 보면, 분명 시계를 봐도 몇 시인지 애매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보통 이경우를 염두하고, 시계리뷰에서는 시인성을 항상 스펙으로 다른 기능들과 더불어 체크하곤 한다.
그런데 필자는 지금 이 책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시인성이라는 단어를 시각적으로 말고, 시간을 인식한다는 성질의 개념으로 접근했다. 즉, 視(볼 시)를 사용한 시인성(視認性)이 아닌 時(때 시)를 사용한 시인성(時認性)이라고 인식해 버렸다. 사실 문맥상으로 보아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 이 두 단어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시간이 정말 볼 수 있는 걸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존재라 시간을 볼 수가 없다. 그저 영향받을 뿐이고, 인식하고, 알뿐이다. 또한 그렇다면 시각적으로만 시간을 알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심장박동 소리로 시간을 알기도 하며, 뻐꾸기시계의 소리, 알람시계의 소리로도 시간을 알곤 한다. 또는 혹시 알람이 진동인 경우 진동을, 안대로 눈을 귀마개로 귀를 가리고 밖에 내보내도 따듯한 햇빛을 맞으면 시간을 촉각적으로 느끼지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감각을 통해 시간을 느낀다. 이 모든 예시를 모두 충족하는 건, 기존의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시인성이 아닌, 시간자체를 인식하는 시인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 두 단어는 시간이라는 기준아래에서 후자의 시인성이 좀 더 상위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그러나 다른 기준에서는 또 다르다). 오랜 시간 떡밥을 깔았다. 이건 그저 시인성에 새로운 한자를 찾았다고 자랑하기만 하는 글은 아니다. 그걸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글이다.
여기서 다음 단계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간을 인식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시간을 자주 보는 편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알람을 자주 맞추는 편인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둘 다 반대의 답을 했다면 왜 그런가? 몰아치듯 물음을 던진 건 이 모든 질문을 물어본다기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는 가벼운 물음이다.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 적이 있는가? 없었다면 가볍게 물음표를 띄워보기 바란다. 우린 시간이라는 4차원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가볍게 시작해 보자.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라는 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해본 적 정도가 아니라 꽤 자주 해당 말을 하는 것 같다. 저 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렇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지 못한 채 꽤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간혹 함께 하기 불편한 상대와 시간을 보낼 때 우린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이제부터 하려는 이 이야기의 진짜 본론과 관련되어 있다. 알게 모르게 본론에 도달했다.
자, 그래서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실 간단하다. 우린 어떤 순간엔 시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순간엔 시간을 잘 인식한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라는 문구의 두 가지 상반된 경우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다. 함께 했을 때 재밌는 상대나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시간도 보지 않고 그 일에 몰두한다. 반면,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우리는 시간을 계속 느낀다.
이게 끝이 아니다. 두 개의 상반된 경우는 상당히 다른 효과를 보여준다. 몰입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시간이 너무너무 빨리 간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플랭크를 할 때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간다.
필자는 이 속성이 시간을 이용하는 데에 가장 어울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몰입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는 시간을 인식할 틈이 없고 그것이 비효율일 수도 있다. 반대로, 플랭크를 하는 사람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언제 끝나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한 두 가지 경우 외에도, 약간 반반 섞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플랭크에 몰입하는 사람이나. 하기 싫은 일이라 느리게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경우. 이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플랭크를 하지만 본능을 거스르고 코어힘에 집중해야 하며 하기 싫지만 꼭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면, 시간을 인식해야 한다.
즉, 몰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인식하지 않아야 하며
반대로 기계적 성취가 필요하다면, 시간을 인식해야만 한다.
여기서 시인성을 적용할 수 있다. 몰입을 위해서는 시간을 인식하기 어려운 시계를 차면 좋고, 기계적 성취를 필요로 한다면, 시인성이 좋은 시계를 차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간이 안 보이는 시계도 그저 상상한다는 말 이상의 몰입이라는 가치와 연결될 수 있다. 그러면 약간은 더 실용적이게 바라볼 여지가 생기는 거다. 그리고 저 시계의 가치는 연결이 안 되는 꿈이나 상상보다는 더 가까이 있는 몰입이라는 가치로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