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가는 여행길은 유난히 즐거웠다.
여행을 적게 다닌 편은 아니었음에도
스페인을 가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유럽 여행을 구성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을
드디어 맞출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찼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만
2주를 여행하기로 했는데,
그 2주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바르셀로나의 여행 콘텐츠들은 무궁무진했다.
가우디 성당과 구엘 공원, 빠에야와 감바스,
피카소, 바르셀로네타 해변,
자라와 망고, FC바르셀로나...
볼 것, 먹을 것, 즐길 것, 살 것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마음으로
바르셀로나 공항을 통과했던 것도 같다.
주어진 시간 동안,
내가 갖고 있는 자유이용권으로
이 놀이공원의 재미있고 인기 있다는
기구들을 모두 타고,
맛있다는 간식과 꼭 사야 한다는 기념품들도
기필코 즐기고 말거라는 그런 마음가짐.
그러고 보니 바르셀로나 공항의
입국 심사 직원들도
놀이공원의 입장 티켓을 검사하는 것처럼
별다른 질문 없이 가볍게 입국 도장을 찍어 주었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편리하게 마련되어 있는 공항버스를 타고,
나와 아내를 포함한 온갖 인종의 사람들은
마치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탄 것처럼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바르셀로나의 도심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리는 말로만 듣던,
2월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따사로운 바르셀로나의 햇살을 받으며
카탈루냐 광장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발랄하고, 세련되고, 자유로웠다.
스페인의 인사말인 ‘올라’는 톤이 높고 가벼워서
발랄한 느낌을 준다.
이 말을 현지인들의 억양처럼 따라 하려면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는데,
그러다 보면 내 기분 역시도
유쾌하고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스페인에 오기 전 여행했던
터키와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특히 터키의 남루한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들과는 달리
바르셀로나의 애완견들은 하나 같이
독특한 코디와 헤어스타일을 겸비한
세련된 패션 도그들이었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펼쳐진
무명 밴드의 연주에
지나가던 어떤 할머니는 남편에게 겉옷을 맡긴 채
20분 동안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었고,
남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봐 주었다.
무엇보다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바르셀로나의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더해 주는 느낌이었다.
나와 아내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은
가우디 성당과 피카소 미술관 같은
바르셀로나의 주요 명소들을 끊임없이 방문했고,
람블라스 거리와 보케리아 시장을 가득 채웠으며,
수많은 맛집들에서 저렴하고 푸짐한
메뉴델디아(오늘의 메뉴)를 먹으며 행복해했다.
정말로 바르셀로나는
관광객들을 위한 놀이공원 같았다.
바르셀로나를 찾아 즐기고 소비하는 관광객들과
이들을 만족시켜 줄 현지의 서비스 제공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종의 테마파크.
꿈과 모험과 희망의 나라.
매일매일 축제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곳.
그 안에서 나는 신나고 즐거웠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한 지 며칠 정도 되었을 때였다.
어둑어둑해진 저녁에,
그날도 우리는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명 낮에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던
지하철역 입구가 봉쇄되어 있었고,
역 주변에서는 경찰들이
다소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유럽을 여행하면서
일시적인 대중교통 파업을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정도의 일이라고 짐작하고
우선 다음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오로지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둔탁한 쇠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골목으로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프라이팬, 냄비, 국자, 숟가락과 같은
주방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들었던 쇠가 부딪히는 소리는
그들이 국자로 냄비를 두들기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미 모여 있던 사람들에 더해서,
많은 사람들이 골목 양 옆에 자리 잡은
주택들에서 나와
각자의 쇠붙이를 들고 합류하고 있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을 향해
쇠붙이를 두들기며 함성을 지르고
때로는 박수를 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백하게도,
관광객들이 아닌
바르셀로나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현지인들이었다.
이곳 바르셀로나는
관광객들을 위한 테마파크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게 바로 그때였다.
숙소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주방도구를 든 그들의 집단행동은
카탈루냐 독립을 찬성하는 인사들을 구금시킨
스페인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그러고 보니 바르셀로나 거리 곳곳에는
노란색과 빨간색 줄무늬가 교차하는
카탈루냐 깃발을 걸어놓은 집들이 많았었다.
바르셀로나의 축구팀인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찾은 축구 경기장에서도
인상 깊은 풍경을 보았었다.
바르셀로나의 상대팀인 지로나 역시
카탈루냐 지역의 팀이었기 때문에,
10만 명에 가까운 관중석을
가득 채운 카탈루냐인들은
그들의 깃발을 흔들면서
결과에 상관없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카탈루냐 독립의 문제는
바르셀로나를 잠시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잠깐의 흥밋거리 정도일 테지만
현지인들에게는 매일매일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의 문제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처럼 최고로 평가되는 여행지,
그러니까 관광객들에게는 마치
힐링의 공간이나 신나는 놀이의 장소,
또는 기분 내는 쇼핑몰로 인식되는 그곳이,
현지인들에게는 버텨내야 하고,
때론 그들끼리 갈등하고 상처 주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삶의 공간일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세계적인 관광도시들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이른바 오버투어리즘의 문제는,
여행지를 관광지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현지 주민들의 삶의 공간으로 인식하느냐의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를 관광지로 인식했을 때의
여행객들의 태도는
현지인들의 삶을 방해하거나
때론 위협할 수도 있다.
여행을 위해 찾은 도시를 관광지로 인식했을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당당해진다.
걸음은 빨라지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세밀하게 이득을 따지게 되고, 어김없이 평가한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나도 그랬었던 것 같다.
시내 곳곳에 자리한 유명 건축물들을 보면서,
아마도 그 건축물들 주변에 살고 있을
현지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며
감상을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내가 숙박한 에어비앤비 숙소 덕분에
나는 현지인들이 사는 집에서 묵는
경험을 했다고 뿌듯해하지만,
사실은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는
어떤 대학생의 하숙집을 빼앗았거나
가뜩이나 비싼 바르셀로나의 월세를
더욱 올리는데 일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몰려든 관광객들을 노린
소매치기와 불법 노점상들 때문에
바르셀로나의 치안과 질서가
더욱 나빠졌을 수도 있다.
바르셀로나를 현지인들의 삶의 공간이 아닌
관광지로 인식한 나의 태도가
바르셀로나 현지 주민들의 삶을 방해하고
위협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미안해지고 조심스러워진다.
북촌의 한옥마을을 찾은
외국인들의 소음과 사진 촬영으로
한옥마을의 주민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외국인들을 향해 분노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바르셀로나에서
내 주위에 있었던 현지인들이
나에게 동일한 종류의 분노를 표출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내가 꼭 여행을 가고 싶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가,
내가 방문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많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여행지는 관광객을 위한 테마파크가 아닌
누군가의 삶의 터전에 더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과 배려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여행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르셀로나를 관광지로 대하면 대할수록,
결국 바르셀로나는 그곳이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을 점차 상실해가며
관광객들의 입맛에만 맞춰진
프랜차이즈 관광지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투어리즘의 문제는
현지인들만의 문제가 아닌
관광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