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강, 세계는 바다
타이완의 대선이 민진당 및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집권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현 총통은 8,170,231표로 57.13%, 최대 적수인 국민당의 한궈위(韓國瑜) 가오슝시 시장은 5,522,119표로 38.61% , 그리고 친민당의 송추위(宋楚瑜)는 608,590표로 4.26%에 불과했다. 동시에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민진당은 61석을 차지하여 38석을 차지한 국민당에 대승을 하였다.
중국에 대해 일국양제를 거부하고 타이완 독립을 지향해온 차이잉원 총통은 당선 소감에서 양안 관계에 있어 중국과의 거리를 더욱 멀리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 당선 소감은 이번 타이완 선거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타이완의 정치는 수십 년간 대륙에서 넘어온 국민당 계열의 사람들과 타이완 토박이들을 중심으로 한 민진당 두 당파의 갈등과 경쟁의 역사이다. 이 두 당은 지역적으로 대륙과 타이완이라는 성격과 함께 보수와 진보를 각각 대변해 왔다. 그리고 서로의 지지층을 결속하여 팽팽하게 대치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표 차이가 2백만 이상이 나는 큰 격차를 보여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와 매체들이 미중 갈등, 홍콩 시위 등을 들고 있다. 한 마디로 반중 정서가 발동했다는 것이다.
반중 정서가 영향을 준 이번 타이완 총통 선거에서 실제 결과를 결정한 가장 큰 원인은 그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타이완 젊은이들의 대대적인 투표 참여가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정치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따라서 선거 참여율이 극히 저조했던 타이완의 젊은이들이 이번에는 대거 투표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바로 "이번 선거가 타이완의 미래를 결정한다"였다. 지지 정당을 떠나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이번 선거에 꼭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이들 타이완의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나간 것이다. 이들 젊은이들 대부분 차이잉원 후보 및 민진당에게 표를 던졌는데 이는 차이잉원 후보에 대한 지지나 민진당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결코 중국의 통치하에서는 살 수는 없다는 의사 표현으로 해석된다.
매체들이 이번 선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제시하는 미중 갈등은 타이완 선거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타이완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국 대륙은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중국은 타이완 사람들에게 무한한 경제적 성장의 기회를 줌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위협도 가하고 있다. 타이완 정계도 중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계승하는 국민당과 타이완 독립을 지향하는 민진당으로 나뉘어 교차한다. 실상 타이완 사람들의 정체성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미중 갈등은 중국의 모순과 가려져 있던 어둠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뒤에 숨어있는 집권층의 특권과 부패, 인민보다 공산당 권력층이 우선하는 현실, 그리고 타이완에 대한 통합 의지와 무력 사용의 정책 등이 어느 때 보다도 선명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타이완 사람들로서는 중국 대륙을 멀리한다는 것은 경제적 발전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며 중국 대륙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나라를 안전을 위협당하는 모순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홍콩 민주화 시위가 진행되면서 중국 공산당 체제와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가장 큰 모순, "공산당 일당 전제와 민주주의", "전체주의적 통제 사회와 시민의 자유"라는 대립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시민의 자유나 주권을 허용하지 않는 체계 임을 명백히 하였고 홍콩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투쟁을 바라보는 전 세계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시민의 자유와 민주는 포기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1년 전만 해도 타이완의 민진당은 차이잉원 총통 하에 많은 무능함을 들어내어 기록적인 지지도 하락을 경험하고 있었다. 15%까지 하락한 민진당의 지지도는 얼마나 많은 타이완 사람들이 민진당 정부에게 염증을 내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일 야당인 국민당이 인기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정계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던 타이완 민중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타났던 것이 국민당 소속의 한궈위 후보였다.
한궈위는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과 싸우다 타이완으로 넘어간 장제스(蒋介石)의 20만 근위군에게 주거지로 주어진 군촌(军村) 출신이다. 이 군촌은 당시 수십만 군인들이 살 주택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당 정부는 땅을 주고 살도록 했고 군인과 그 가족들은 말하자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토박이들은 이들 대륙에서 넘어온 말도 잘 안 통하는 군인 가족들을 멸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군인 가족들은 대륙 각지의 사투리를 하였고 타이완 토박이들은 타이완 사투리를 말했기 때문에 서로 소통도 잘 되지 않았고 군촌 사람들은 토박이들을 촌사람으로 보고 토박이들은 군인 가족들을 거지라고 멸시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륙에서 넘어온 이 사람들이 타이완의 모든 정치권력을 무력으로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쪽 진영의 유혈 사태 228 사건도 있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에 유명한 비정성시(悲情城市)가 있다 이 시기의 사회 배경을 모르면 이해되지 않는 영화이다.
필자의 아내도 이런 군촌에서 자란 사람이다. 장인 어르신은 국민당 군대에서 대령으로 예편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정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중국 대륙에서 장제스와 함께 넘어온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중국인'으로 가지고 있으며 국공 내전에 잃은 구만리 강산을 되찾고 중화민국의 깃발을 자금성에 올릴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타이완 토박이들의 시각은 달랐다. 대륙에 넘어온 "외성인(外省人)"과는 달리 자신들을 굳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이완은 원래 멀리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가 명나라가 망할 때 청 나라와 싸우던 정성공 등이 항거하던 거점이었고 청 나라가 군대를 보내 반정부 세력을 일소하였지만 관공서를 유지할 정도의 경제 규모가 되지 않아 사실 상 방치했던 곳이다. 그리고는 청일 전쟁에서 청 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일본에 할양하였다. 중화민국이 건국될 때에도 사실 상 대륙 중앙 정부의 손이 닿지 않아 말하자면 장기간 타이완 사람들은 자치를 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좀 살만하면 외지에서 군대가 밀고 들어와 타이완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들 내성인(内省人)으로 불리는 토박이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수십만의 군대가 밀고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좋게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국민당의 권위주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점차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민진당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외성인들이 적은 타이완의 남부 지역은 이들 민진당이 지난 수십 년간 지방 정부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 번도 국민당에게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타이완 남부의 항구 도시 가오슝(高雄)에서 한궈위가 사단을 일으켰다. 한궈위는 예전에 군촌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당시 천쉐이비엔(陈水扁, 후에 최초의 타이완 토박이 출신 총통이 되었다) 의원을 폭행하여 정가에서 축출되었다가 십 년 이상을 실업자 생활을 하다 국민당 집권 시절 농수산물 시장 총경리를 하면서 경영 수완을 나타낸 후 다시 야인 생활을 하다가 아무도 국민당이 승리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가오슝 시의 시장 후보로 국민당에서 추천을 받았다. 사실 상 물을 먹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오슝의 골목길과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돌아보지 않는 서민들의 고달픈 생활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애썼고 마침내 민진당 지지 일색이던 가오슝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 마침내 가오슝 시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궈위의 딸이 동원한 세 사람의 친구가 SNS 활동을 해 준 것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궈위의 가오슝 시장 당선은 국민당의 승리가 결코 아니었다. 구태의연한 정치가들에게 신물이 난 타이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해결하려 할 것 같은 새로운 정치 인물의 가능성을 보인 것이 승리의 원인으로 보인다. 국민당으로부터의 지원도 변변치 않았고 당내 비판도 많았는데 이것이 거꾸로 이제까지 민진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한궈위를 지지하는데 대한 마음의 장벽을 낮춘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국민당에게도 민진당에게도 기존 정치인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난하고 고생하는 그리고 이토록 아무런 지원이나 자원이 없는 정치인이라면 우리의 애환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해결하려 할지 모른다는 어떤 희망의 빛을 주었던 것이다. 결국 한궈위에 대한 기대는 계속 에스컬레이트되어 가오슝 시장이 되자마자 총통 후보로 거론이 되었고 국민당 내 경선에 승리, 국민당의 총통 후보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한궈위 개인으로서는 당분간은 가오슝 시장으로서 경륜을 쌓고 세력을 비축한 후 다음 총통 선거에 나서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흐름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확실히 초기에는 한궈위는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민진당의 차이잉원 현 총통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앞서 말한 미중 간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친미 반중을 분명히 한 차이잉원과는 달리 중국에 대한 한궈위의 태도는 불명확했다. '일국양제'에 대한 태도 또한 모호했다. 그리고 차이잉원 현 총통이 미국 트럼프 정부에 매우 협조적으로 나선 것에 비해 한궈위 및 국민당의 태도는 모호했다. 대선 전에 진즉 차이잉원 총통이 미국을 방문하여 지지를 다지고 온 것에 비해 한궈위는 미국을 가니 마니 하다가 결국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콩의 중련반(중국 연락 반공실, 중국 대륙 정부의 주홍콩 사무실)은 방문함으로써 친중이라는 공격이 일어나는 계기를 자초하였다. 심지어 가오슝 시장 선거 시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2천만 위안을 받았다는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한궈위가 받고 있었던 공격들은 한국에서 조국 전 장관에게 행해지던 공격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트럼프 정부 또한 타이완의 정권은 대중 포위 전략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한편으로는 타이완에 최신 무기의 공급, AIT(American Institute in Taiwan, 미국의 주 타이완 외교 기구)의 설치 및 소수이지만 경비를 위한 미 해병 파견(타이완에 미군이 들어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등으로 타이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중국과의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소위 9.2 컨센서스(중국 대륙과 타이완은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성명으로 1992년에 발표되었다)를 들먹이며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임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타이완의 무력 통일 가능성을 거론하여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자 민진당은 한궈위나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내통한다며 공격했던 것이다. 사실 수십 년에 걸친 국공 내전을 치른 국민당에게 친공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과거의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유효하게 잘 먹혔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친중의 국민당, 반중의 민진당이라는 보도를 자주 하는데 이 말은 보다 신중하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과 민진당은 이렇게 국민당=중국 공산당이라는 프레임으로 계속 공격하였다. 그 와중에 터진 것이 왕리창 사건이다. 왕리창(王立强)은 중국 대륙의 젊은이로서 호주에 간 후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였다. 그는 자신이 중국 정보 부문을 위해 일을 한 스파이였으며 그의 상사는 홍콩의 투자회사 오너인 샹신(向心)이라고 하였다. 샹신은 부인 공칭(龚青)과 함께 타이완을 방문한 후 출국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중국 당국은 왕리창이 사기꾼이며 중국에서도 전과가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샹신 부부가 중국 권력층, 소위 태자당의 일원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타이완 정부는 이례적으로 매우 신속하게 샹신 부부를 체포했는데 사실 상 미국이 배후에서 작용하여 호주 정부와 타이완 정부를 움직였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 사건은 내용이 복잡다단하거니와 진실과 거짓, 그리고 미국, 중국, 타이완, 호주 등 여러 나라의 국제 정치적 음모가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궈위 및 국민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대선은 "친중의 국민당, 반중의 민진당"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싸운 민진당에게 돌아갔다. 대선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홍콩을 지지하는 플래카드가 걸린 것은 이번 선거를 상징하는 일이다. 홍콩 시민들은 외로운 시위를 하면서 타이완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들은 "홍콩은 타이완의 내일(今日香港,明日台湾)"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었는데 이제 반중 독립을 지향하는 타이완의 여론이 확실해지자 이들은 다시 "타이완의 오늘은 홍콩의 내일(今日台湾,明日香港)"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더욱 민주화 운동에 힘을 쓰고 있다.
우리가 타이완이라는 한 국가 만을 떼어서 본다면 이번 대선은 한 권의 소설이 될 만하다. 민중의 지지를 상실한 집권 민진당이 낡은 국민당에서 혜성처럼 출현한 정치 스타 한궈위에 의하여 도전받는다. 점심 먹을 돈 조차 없어 국민당 중앙에 점심 도시락 값 만이라도 지원해 줄 수 없느냐고 간청했던 한 사나이가 혈혈단신 사람들의 지지를 발로 뛰며 하나씩 얻어내어 결국 가오슝 시장에 당선되고 총통에 도전한다는 것이 줄거리가 될 것이다. 대하소설, 즉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고 아마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를 거부했다. 이제 세상은 한 나라의 이해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타이완은 세계의 열강인 미중에게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중요한 전략 상의 요석이며 친미 반중의 차이잉원과 그 대척점에 있는 한궈위는 트럼프와 시진핑에게는 절대로 방치할 수 없는 장기판 위의 돌인 것이다. 여기에 타이완 민중들은 홍콩 사태에서 경감심을 가지게 되었다. 호주에서는 왕리창 사건을 투척했다. 이번 선거는 순수하게 타이완 내부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미중 갈등의 한 고리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계라는 바닷속에서 타이완이라는 강물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외세가 타이완 국내 정치에 영향을 크게 준 이 사태는 불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타이완의 민중, 타이완의 젊은이들이 자유 의지로 타이완의 미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골수 국민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필자의 집사람도 타이완의 젊은이들이 이 방향을 원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과를 수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반대 의견을 수용하는 민주의 메커니즘이다.
국민당의 지금 모습은 지난 세기 국공 내전 또는 국공 합작을 하던 전 시대적 모습에서 변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백 년 전의 모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민진당이라고 해서 희망찬 21세기 비전,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방향이 있다. 나쁜 의사결정이라고 해도 없는 의사결정보다는 좋다는 말이 있다. 이 선거는 그런 의미에서 민진당의 승리가 아니요 국민당의 패배이다.
이러한 사상의 도도한 역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20세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단 국민당 만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들이 20세기 식의 패러다임으로 21세기 대국 굴기를 꿈꾼다면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를 이끄는 선도 국가는 커녕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침몰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타이완으로 대표되는 미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국가주의, 개인의 자유와 전체주의의 충돌점은 이 모든 단어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가치 체계를 제시할 수 있을 때 만이 진정한 해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