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기자와 구경꾼이 뒤엉켰던 909호 앞은 적막강산으로 변해 있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910호 여자는 자기 집과 909호 사이에 있는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낮 시간의 대부분을 계단에서 지박령처럼 붙어 앉아 있던 909호 아이가 보이지 않은 지도 한 달이 넘었다. 그 사이, 실종 신고된 아이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아이의 엄마와 동거남이었다. 또한 그 사이, 910호 여자의 엄마가 3년간의 암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아이는 계단에서 장난감 기차를 가지고 놀았다. 주위에서 인기척이 나도, 말을 걸어도 기차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게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꼬마 주인공의 대사라는 걸 여자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처음엔 기차에 찍힌 999란 숫자를 보고 유튜브에서 주제가를 찾아 들려주었다. 그렇게 아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은하철도를 타고 우주로 여행을 떠날 거라는, 역시나 애니메이션 꼬마 주인공의 대사이자, 작고 어눌했던 아이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여자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시어 빠진 김치 한 접시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영원한 생명은 못 얻고 유한한 생명을 잃은 아이를 위해 한 잔, 긴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을 찾은 엄마를 위해 또 한 잔, 치료비 대느라 망가진 손목과 생계를 위해 다시 한 잔, 4년째 방 한 귀퉁이에 모셔 두고 있는 여행 가방을 위해 또다시 한 잔…… 그렇게 마신 술의 무게에 눌려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을 울리는 진동과 소음 때문에 눈을 떴다. 강열한 빛을 쏘면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길고 거대하고 검은 그것은 베란다 바깥의 캄캄한 허공에 멈춰 섰다. 몸통에 909라는 숫자가 찍힌 그것의 정체는 바로 기차였다. 기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909호 아이였다. 죽은 아이가 멀쩡히 살아나서 자신에게 손짓하는 걸 여자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같이 가요, 여행. 어서 떠나자고요.”
크고 씩씩해진 아이의 말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뒤, 베란다 난간에 매달렸다. 허공으로 뻗은 왼손이 아이의 손과 만난 데 이어서 왼발이 기차 발판에 닿는 순간, 위태롭게 난간을 붙잡고 있던 오른손이 풀렸다. 덩달아 오른발도 허공을 갈랐다. 바로 그때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다음날 아침,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햇살로 환해진 방 안. 여행 가방이 놓여 있던 한 귀퉁이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