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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Jun 07. 2021

세상은 날마다 황사

간편소설 스물셋

거인의 넓은 정원에 풀이 돋고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비가 날아들었습니다. 나비보다 먼저, 아니 꽃보다, 풀보다 먼저 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걷고 뛰는 아이들의 발밑에서 언 땅이 갈라지고 얼음이 녹고 물이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습니다.


창문을 활짝 연 거인은 따뜻하고 향기로운 공기를 흠뻑 빨아들였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도 한껏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벌집을 채운 꿀처럼 거인의 폐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가득 들어찼습니다. 그 위에 꽃가루 같은 미세먼지가 토핑된 건 얼마 후의 일이었습니다.


눈도 따갑고 코도 따갑고 목도 따갑고.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와 물로 씻어냈지만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코에선 콧물이, 목에선 마른기침이 나왔습니다. 갑갑하고 쑤시 열나고 추웠습니다. 이내 몸져누웠습니다. 거인이 끙끙 앓는 동안, 굳게 닫힌 창문 밖에서는 누런 모래바람이 배고픈 소떼처럼 느릿느릿 지나갔습니다.


“이놈의 황사, 정말 지독하군.”


꼬박 일주일을 앓고 일어난 거인이 푸념했습니다. 창문 밖은 여전히 소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 누런 존재들보다 더 지독한 게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는 기역자로 허리가 굽은 노인이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러 갔습니다.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라며 거인은 혀를 찼습니다. 또 하루는 커다란 털북숭이 개를 앞세운 채 중년 여자가 지나갔습니다. 주인은 이상하고 개는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젊은 남녀가 손을 꼭 잡고 지나갔는데, 카페로든 모텔로든 어서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픈 걸 꾹 참았습니다.


무엇보다 지독한 건 매일 정원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사방이 먼지투성인데 웬 놀이냐 싶어서 첫날은 밖으로 나가 말리려 했습니다. 그때 기침과 함께 피고름 섞인 가래가 튀어나와 거인을 말렸습니다. 내 몸부터 챙기자는 생각과 아이들을 저리 나둬도 되겠냐는 염려가 들러붙어 싸웠습니다.


“이런, 오늘은 야구 놀이까지 하네.”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거인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부모들의 무심함에 열 받고, 자신의 비겁함에도 열 받아 한껏 달아오른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창문의 유리가 먼저 쨍그랑 깨졌습니다. 바닥을 구르는 공. 동그래진 거인의 눈에 잡힌, 동그랗게 뚫린 창문의 구멍. 그 구멍 안에는 놀라서 굳어버린 아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맺혀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거인은 깨달았습니다. 여태 먼지 낀 창문으로만 보았기에 세상은 날마다 황사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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