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매대 사이에서 만난 옛사랑

간편소설 넷

9년 만이었다. 시간의 페이지를 뭉텅 넘어온 그녀가 과자들이 활자처럼 빽빽이 진열된 매대와 매대 사이에 서 있었다. 나는 매대와 중앙 통로가 교차하는 어름에서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각기 쇼핑카트를 앞세운 채 서로에게 밑줄을 긋고 있는 그녀와 나를 중심으로 시공간이 수축하는 느낌이었다. 9년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두께로 인해 서늘하게 환기되는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4년간의 연애와 프러포즈,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벌어진 예비 장인 장모의 사고사, 눈물과 통곡의 장례식, 기약 없이 연기된 결혼식, 방황과 갈등, 이별과 재회, 그리고 다시 갈등, 5월의 장미처럼 붉은 마음들이 서로 찌르고 다치면서 핏기와 온기를 잃어가다가 끝내 결별. 돌아선 등 뒤로 굳게 입을 닫았던 그녀와 나의 서사가 뜻밖의 시간과 장소에서 오랜 침묵을 깨려 하고 있었다.


잘 지냈니?


빙산의 꼭지 같은 안부의 말이 목구멍 아래에 잠겨 쉬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저 출렁이는 감정의 물살이 눈가와 입가로 밀려와 어색한 웃음을 적실 따름이었다. 눈빛으로 전하는 수십, 수백, 수천의 말들. 해빙되어 그녀에게로 흘러가고, 해금되어 내게로 밀려올 이야기들. 점자처럼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을 더듬고파 달싹거리는 나의 손가락들이 쇼핑카트를 과자 매대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찰나였다.


“여보!”


중앙 통로 저만치에서 아내가 나를 불렀다.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허둥지둥 아내 쪽으로 쇼핑카트를 밀어갔다. 뭔가 섭섭하고 억울하고 뜨거운 감정이 북받쳤다. 황급히 덮어버린 책의 갈피 같은 과자 매대 안에서 그녀가 빠져나온 건 아내가 그릇들이 진열된 매대 안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잠깐 이쪽을 바라보다가 중앙 통로를 따라 멀어지는 그녀를 눈으로 배웅하던 나는 아내가 서 있는 매대와 매대 사이로 쇼핑카트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