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신나는 책을 찾았습니다. 하루키처럼 놀기를 올해의 컨셉으로 잡고 있던 차에 술과 하루키를 주제로 한 책을 찾았습니다. 조주기능사이기도 하신 조승원 작가님이 공들여 조사한 자료들이 흥미롭습니다.
"하루키가 지금까지 펴낸 중/장편 소설은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총 14편, 맥주는 이 모든 작품에 빠지지 않고 나온다. 단 한편도 예외가 없다"
얼마 전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나왔으니 15편이겠네요. 집에 가서 맥주 이야기가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하루키가 언급한 맥주에 대한 문장들을 몇 개 소개하겠습니다.
"차가운 버드와이저 맥주를 주문해 꿀꺽꿀꺽 단숨에 들이켰을 때는 정말 살 것 같았다. 그 순간 이 빌어먹을 세계의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내 몸에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왔다. 리얼하게, 차갑게, 음, 세상에는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 [하루키의 여행법]
"42킬로미터를 완주한 뒤에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는 맥주의 맛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으로, 이를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생각해 낼 수 없다. 그러니까 대개 마지막 5킬로미터쯤은 계속 "맥주, 맥주"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달린다. 이렇게 가슴속까지 맛있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42킬로 미터라는 머나먼 길을 달려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좀 잔혹한 조건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아주 정당한 거래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이봐, 우리 둘이서 팀을 만들어 보지 않을래? 틀림없이 무슨 일이든 잘 될 거야."
"그럼 첫 번째로 무엇을 할까?"
"맥주를 마시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여름 내내 나하고 쥐는 마치 무엇인가에 씐 것처럼 25미터 풀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맥주를 퍼마셨고, 제이스 바의 바닥에 5 센티미터는 쌓일 만큼의 땅콩 껍질을 버렸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여름이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지금이 은퇴할 적당한 시기일지도 모른다고 쥐는 생각 했다. 이 술집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수천 병의 맥주, 수천 개의 감자튀김, 수천 장의 주크박스 레코드, 모든 것이 마치 거룻배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 갔다. 나는 이미 맥주를 충분히 마신 게 아닐까?"[1973년의 핀볼]
"목이 마른데"
"맥주 마실래요? 아니면 물?"
"맥주가 좋겠군."하고 나는 말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하루키처럼 맥주 마시는 법이라는 챕터도 재미있습니다. 하루키는 맥주의 온도에 민감한 편인데,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항상 '매우'차가운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냥 차가운 수준이 아니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가운 맥주여야 합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맥주를 차갑게 마시는 광고들이 많은 게, 맥주의 모자란 맛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정 부분 공감은 했지만 그래도 맥주는 시원한 맛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첫 잔의 그 시원한 느낌이 참 좋습니다.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적정온도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4~7도 = 라거 맥주
(그래서 라거가 주류이던 시절 맥주광고들이 시원함을 어필하는데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8~12도 = 대다수 에일과 밀맥주
-12~14도 = 흑맥주(포터, 스타우트)
-14-16도 = 발리 와인과 임페리얼 스타우트
대체로 맛이 무거워질수록 권장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온도를 달리해서 실험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라거와 에일의 차이와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루키 작품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맥주는 하이네켄입니다. 장편소설 속 주인공들이 수시로 마시는 장면은 물론이고, [하이네켄 맥주의 우수한 점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를 통해 "하이네켄은 철자에 R이나 L이 들어있지 않아서 해외에 나갔을 때 발음하기가 편하다"라고 하루키스러운 문장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하이네켄 맥주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대한 단문]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이네켄은 '하이네켄 A'라고 부르는 효모에서 특유의 맛이 나온다고 합니다. 무려 파스퇴르의 제자인 '엘리온'박사가 만든 효모는 1886년부터 지금까지 사용 중입니다. 생산 공장은 전 세계에 퍼져 있지만, 효모만큼은 본사에서 항공편으로 보낸다는 사실.
"맥주 광고에는 절대로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밝힌 하루키가 유일하게 광고에 출연한 삿포로 맥주도 있습니다. 다음은 내레이션을 통해 하루키가 읽은 문장입니다.
"드디어 마라톤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폭염 속에 42킬로미터를 끝까지 달렸다는 성취감 따위는 없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 정도. 마을의 카페에서 한숨 돌리며 차가운 맥주를 성에 찰 때까지 마신다. 맥주는 물론 맛있다. 하지만 내가 달리며 간절히 상상했던 맥주만큼 맛있지는 않다. 절박한 인간이 꿈꾸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삿포로 맥주 CM '달리기에 관한 말'
하루키는 그 대가로 받은 수익금 전액을 동일본 대지진 구호 성금으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삿포로 맥주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로, 1876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홋카이도 지방은 원래 물이 맑기로 유명했는데, 기후도 냉랭해 맥주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환경. 특히 세계적인 맥주 생산지인 독일 뮌헨과 똑같은 북위 43도에 위치했다는 건 또 우연. 작년 홋카이도 마라톤 참여차 삿포로에 가서 매일 2병씩 마신건 자랑. 특히 북해도 지역 내에서만 판매하는 삿포로 클래식은, 조금 더 향이 강했던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맥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니, 필스너도 생각나고, 코젤도 생각나고, 버드 와이저도 생각나고 한 때 즐겨마시던 빅 웨이브 맥주도 생각나고, 아직 먹어보지 못한 개항로 맥주도 생각나고. 술 생각만 계속계속 나서 행복할 지경입니다. 내일은 진짜 맛있는 맥주를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