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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Apr 24. 2024

오늘은 커티삭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소소한 술 이야기

오늘은 커티삭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하루키가 사랑한 위스키이죠. [커티삭 자신을 위한 광고]라는 시에 가까운 에세이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초록색 병에 든
영국산 위스키가 아니라
실체를 잃어버린
마치 꿈의 꼬리 같은 모양의
커티삭이라는 원래
말의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말의 울림 속에 얼음을 넣어 마시면
맛있다고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다고요’라는 감상은 되어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 중에 커티삭이 나오는 장편 소설은 모두 6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최근에 다시 읽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소설에도 주인공이 커티삭을 마시는 모습이 자주 나왔습니다. 설정상 맥주도 반 밖에 안 마시는 알코올무능력자인데 40도나 되는 술을 마시는 게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뭐 위스키가 가지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느낌을 가져다 쓰려고 한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1 Q84]에서는 주인공인 아오마메가 커티삭 하이볼을 마시는 남성에게 작업을 거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남성을 선택한 논리가 그럴듯합니다.


그러더니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갈이나 까다로운 싱글 몰트가 아닌 점은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1Q84]


그러고 보니 하루키는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까지 썼었죠.. 거기에도 멋진 문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위스키 성지여행]
[하이볼로 드시기에 딱 좋은 술인듯 합니다]


술병의 라벨이 인상적인 위스키이기도 합니다. 초록색병에 노란 범선이 그려진 방패모양 라벨이 유명하죠. 원래는 크림색 라벨이었던 것을 인쇄업자의 실수로 노란색으로 인쇄가 되었고, 오히려 좋아서 아예 노란색으로 바꿔버렸다고 합니다. 커디삭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당시에 유명한 범선이었던 동명의 배 이름이기도 합니다. 게일어로 짧은 스커트라는 뜻으로 짧은 스커트를 입고 바람과 같이 빨리 달릴 수 있었던 젊은 마녀의 이름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당시 가장 빠른 무역선을 가리는 경주에서 우승한 이력도 있는 쾌속선입니다. 지금은 영국 어딘가의 강가에 영구 정박되어 있다고 합니다.


[통크게 배를 기부하는 클라스가 부럽습니다.]


1923년에 출시된 커티삭은 미국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스카치위스키입니다. 출시 당시 미국에선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스카치위스키 밀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이 부드러운 위스키를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해 스카치 특유의 피트향은 거의 없애고, 순하고 가벼운 맛에 색깔도 연하게 만들었습니다. 깔끔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살짝 단 맛도 있어서 하이볼용 기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밍밍한 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면받기도 합니다. 나무위키에는 이렇게 나와 있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해당문서를 작업한 사람에게는 불호였던 듯합니다. 하루키가 보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네요.


단 향이고 뭐고 숨참고 꺾어먹는 희석식 소주에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의 경우는 오히려 자극적인 향이 적고 적은 양으로 취한다는 게 무지막지한 강점이라 위스키를 잘 모르거나 취기를 위해 샷으로 먹고자 하는 주당들에게 선물용으로 제격이다. 도수에 비해 알코올향은 신기할 정도로 없다시피 하여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 좋으며 술자리에서 부어라 마셔라 용도로 제격인 위스키이다.


최근에는 편의점에서 19900원이면 살 수 있기도 해서 ‘부어라 마셔라’를 즐겨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술인 것 같습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그린 북]에서도 커티삭이 등장합니다. 탁월한 피아니스트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한계를 가진 돈 셜리 박사가 1960년대 미국 남부 투어를 하며 운전기사이자 가드였던 토니와 겪는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네이버 평점이 무려 9.55. TV에서도 가끔 하니 기회가 맞으면 보셔도 후회는 안 하실 영화입니다. 영화초반, 셜리박사가 토니에게 몇 가지 가이드를 주면서 매일 커티삭 1병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멋진 주인공이 폼 잡으면서 말해서 되게 고급술인 줄 알았었는데, 자료를 찾다가 보니 커티삭이 1961년 미국에서 최초로 100만 케이스가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있네요. 그냥 우리로 치면 매일밤 진로 1병씩 준비해 줘요 정도의 느낌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초록병의 소주 한잔으로 하루를 버티어 가듯, 셜리박사도 초록병의 커티삭으로 하루를 견디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욕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멋졌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이번주 금요일 하루키를 같이 읽고 있는 사람들과 커티삭을 나눠 마실 계획입니다. 다자키 스크루에 대한 얘기를 하는 자리인데 소설 속에서 자주 언급된 술이라 책과 위스키의 페어링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역시나 책에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 리스트의 Le mal du pays까지 들으면서  하늘 끝까지 폼을 잡아 봐야겠습니다. 다음에는 위대한 게츠비에 나오는 칵테일에 관한 얘기를 모아볼까 합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이 영화도 진짜 잘 만든 영화입니다. 자신있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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