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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라는 종교

똥 같은 패배에도 일상을 유지하는 방법

by 오제명

롯데 같은 팀을 30년 넘게 응원하다 보면 어느새 종교의 영역에 다가서게 된다. 요즘 문제가 되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처럼 절박한 광신도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낮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 해탈, 관조, 받아들임, 용서 같은 감정의 상태가 일상에 스며드는 수준에 이른다는 말에 가깝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실천적 신앙 태도를 강조하는 로마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 로마서 12:16

우승을 원한다면 열에 아홉은 고통 속에 있어야 할 것이고, 가을야구를 바란다면 둘 중 하나의 경우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관조하는 수준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편안한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진리. 의도와 목적을 내려놓고 아무 치우침 없이 지켜보는 것, 그것이 롯데 팬에게 허락된 인생이다.

불교의 화엄사상은 또 어떤가.

“우주의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하거나 홀로 일어나는 법이 없고, 모두가 서로의 원인이 되어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한다. 이 법계연기의 세계는 곧 부처의 자비가 충만한 연화장 세계다.”

롯데의 잘함과 못함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그 애증의 팀은 욕하고 비난할 대상이 아니라,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할 대상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어제 KT와의 경기가 그렇다. 비록 9회 말 마무리 투수의 난조와 3루수의 악송구로 허망하게 날려버린 경기였지만, 그래도 승산 없어 보이던 경기가 9회까지 팽팽하게 이어졌고 잠시라도 역전의 기쁨도 만끽하지 않았던가. 그간 무기력하게 무너진 수많은 경기에 비하면, 잠시라도 가슴 뛰지 않았는가. 그 정도면 하루치 환희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꾸란에도 용서의 메시지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들이 언약을 어겼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 그들은 말씀을 왜곡하고 상기된 것의 일부를 잊어버렸다. 그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 항상 그들에게서 배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잘못을 너그러이 여기라. 진실로, 알라는 선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 수라트 알-마이다 5:13

아, 진실로 알라는 용서하고 선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가을야구의 언약을 어겼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고, 항상 롯데에게서 타 팀을 위한 플레이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롯데를 용서하고 그 실책을 너그러이 여기라.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인샬라. 롯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종교를 서너 개쯤 거쳐야 한다.

어제 경기장에서 야구 룰이 아직 어색한 초등학생 팬을 만났다. 수원에 사는 친구인데, 기특하게도 롯데를 응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규칙을 설명해 주고, 먹지도 않을 꼬깔콘을 사고 받은 띠부띠부씰도 선물해 주었다. 볼넷이 뭔지도 모르던 꼬마가 목이 터져라 선수들의 이름을 외친다. 차 막힘을 걱정한 엄마가 가자고 보채도 한사코 남아 짝짝이를 흔드는 모습. 끊임없는 실패를 응원하는 단단한 마음이 세대를 건너 이어진 순간이었다. 쉽지 않을 삶의 방식을 택한 그에게 건투를 빌어주었다.

롯데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이미 받아들였다면, 경기의 승패나 한 해의 순위가 아닌 다른 빛나는 순간들에 마음을 두자. 경기 시작 전의 두근거림, 수만 명이 함께 응원하며 느끼는 벅찬 울컥함, 순백의 라이트가 빛나는 녹색의 그라운드.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쌓여 만들어지는 이야기와 역사. 거기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내가 하반기직관을 너무 많이가서 계속 지는게 내 탓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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