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제명 Jan 21. 2024

진짜로 뛸 줄 몰랐어, Paris

2023년 파리 마라톤

'누구나 계획은 있다. 처 맞기 전까지는" 당연히 나도 계획이 필요했다. 국내 대회였다면 출발 전에 화장실이나 제대로 다녀오는 것 말고는 다른 준비는 크게 필요 없었겠지만, 파리에선 대회장까지 가는 방법부터 고민해야 했었다. 출국 전에는 길도, 말도 모르는 곳에서 달릴 생각에 걱정이 많았지만, 언제 한 번 놀러 오라던 그 후배가 자기 일처럼 준비를 도와주어서 다행이었다. 대회 전야. 파리근교 민철이의 집에서 코스맵과 와인을 꺼내놓고 작전회의를 했었다. 계획은 이랬다. 우선 나와 내 와이프는 출발 시간 2시간 전에 여유 있게 출발한다. 하루치 여행가방을 꾸려 미리 예약해 둔  파리 시내 숙소에 보관한다. 이후 스타트 라인이 있는 샹젤리제거리로 간다. 출발 전의 기쁨을 담은 사진을 찍고 핸드폰과 바람막이를 와이프에게 맡긴다. 레이스 전략은 5분 정도의 페이스로 25킬로 지점까지 달려  커피와 빵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배네 가족과 와이프와 하이파이브를 한 다, 그 뒤로 6분대로 페이스를 늦춰 개선문까지 남은 코스를 달린다. 응원단은 먼저 피니시 지점으로 도착해 파리 골목투어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승리자의 기세로 들어오는 내 사진을 찍는다. 중간중간 힘들 수 있으니 파워젤은 넉넉하게, 출발 시점 에는 다소 추울 수 있지만 달리다 보면 더워질 거니, 81년생 동갑내기 크루에서 맞춘 푸다닭 싱글렛을 입고 뛴다.

시작은 괜찮았다. 파리로 향하는 RER이 제시간에 도착했고,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탑승할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돌이켜 보면 비는 계획에 없었기에 이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웠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대회 직전의 Fever상태에 빠져있었다. 파리 시내가 가까워질수록 대회 참가자가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탑승하기 시작했고, 마음은 둥실둥실과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고양감에 기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출발시간에 10분에서 20분 정도의 차이를 두는 우리나라 대회와 달리,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파리마라톤은 목표기록별로 출발시간이 한 시간 이상 차이가 났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가 많은 편이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가서 먼저 몸이라도 풀어야 되지 않을까. 2주 전 서울에서 3시간 35분을 뛰었으니 오늘은 3시간 45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우르르 몰려가는 수많은 러너들을 보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과 유해한 경쟁심리가 발동해 버렸다. 겁도 없이, 아무래도 몸을 좀 풀어야 할 듯하니 숙소에 짐은 혼자 맡기고 와달라고 와이프에게 부탁했다.

지하철을 내려 지상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많이 굵어져 있었다.  비를 약간 맞으며 대회장소에 도착하니 Sub3를 목표로 하는 주자들이 막 출발하고 있었다. 클럽 디제이를 연상시키는 사회자가 불어로 카운트 다운을 하고, 출발선에 선 선수들이 양손은 깎지를 끼고 돌리거나, 다리를 털며 따라 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기록을 노리는 선수들이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기 크고 빠른 보폭으로 치고 나갔다.  이어서 수 천의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거리로 쏟아졌고 주위를 가득 채운 응원인파들이 '알레알레', 축구 응원가에서 들어본 그 소리를 외쳤다. '알레'는 앞으로 마지막 피니시 지점까지 이어질 응원의 소리였다.

스타트하는 영상을 촬영하고 나니 추위가 밀려왔다. 비는 어느 정도 그쳐 천연 미스트 수준이 되었지만, 4월의 날씨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온이 떨어져 있었다. 싱글렛 위에 얇은 바람막이 한 장 걸친 게 전부여서 너무 추웠다. 빨리 조깅이라도 하고 몸에 열을 좀 올려야 했는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출발 시간에 맞춰 나눠둔 그룹별 대기 장소에는 약간의 공간이 보였지만, 그 마저도 달리기에는 충분한 공간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들어가는 길을 찾기 어려웠다.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몇몇 참가자들은 펜스 사이의 틈새를 벌려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었다. 와이프를 기다려 핸드폰과 바람막이를 맡겨야 했던 나는 근처 맥도널드 앞에서 자리를 잡고 섰다. 안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이미 만석, 그나마 잘 보이는 자리를 찾고 제자리에서 할 수 있는 동작들로 몸을 풀었다.

30여분 추위와 싸우고 있는데 와이프가 도착했다. 짧게 인사하고 25킬로 지점에서 보자고 핸드폰과 바람막이를 건네어 주고 가려는데 잔소리를 한다. 추우니 겉옷을 입고 뛰라고. 나는 약간의 짜증을 섞어 달리기 안 해본 티를 내지 마라고, 출발하고 10분 안에 더워서 나중에는 짐이 될 뿐이니. 새 나이키 바람막이를 길가에 버릴 수는 없지 않냐고 바락바락 우겨서 계획대로, 핸드폰 없이 싱글렛만 입고 대기 장소로 갔다. 미리 말하자면, 와이프 말을 잘 들어야 한다. PB를 목표로 달릴게 아니라면 핸드폰도 꼭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러니까 내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말이고, 마지막 기회도 놓쳤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튼 달리기의 작가님처럼, 나도 개고생을 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대기장소에 서니 한국인은커녕 주변에 동양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나이키 피팅 모델 같은 사람들이 흔하게 있었다. 대부분 겉 옷을 입고 있었다. '4시간 30분을 목표로 하는 그룹이라 그런가, 다 옷을 입고 있네. 나는 줄은 여기 섰지만 4시간 안에는 들어올 거니 뭐 싱글렛이 적절하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신발 브랜드를 보며
 '우리나라랑 다르게 나이키 말고 다른 것도 많구나, 우리나라는 전부다 나이키 판인데'. 이런 생각도 하고,

 '와, 저 앞에 사람들도 다 나가려면 30분은 더 걸리겠네, 그래도 여기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좀 덜 추운 거 같기도 하네'

'아 여기는 중간에 입고 온 헌 옷을 버리는 곳이 있구나. 우리나라는 대부분 비옷 입고 있다가 버리고, 옷 입고 온 사람도 그냥 길가에 던지던데 출발 직전에 저렇게 벗어놓고 가게 하면 나중에 모으기도 편하겠구나'

이렇게 혼자서 모국어로 떠들던 중에 드디어 우리 그룹의 차례가 되었다.

"카트흐, 투하, 두, 엉"

앞 조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카운트 다운 소리에, 저게 불어로 4.3.2.1쯤 되겠구나. 카트 머시기는 쿼드라 킬 할 때 그 쿼드라 비슷한 건가? 처음 듣는 불어 숫자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풀코스 처음도 아니고, 겨울에 훈련 열심히 했으니, 초반에 휩쓸리지만 않으면 4시간은 가능할 거야.'

'침착하자!'  '천천히!'

결심은 흩어지게 마련, 출발과 동시에 그 넓디넓은 샹젤리제 거리, 은근한 내리막을 내달리는데 주변에선 귀가 아플 정도로 '알레알레' 각자 만들어온 피켓을 흔들며 소리치고, 옆에 아저씨, 아가씨, 삼촌들도 잔뜩 텐션이 올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며 뛰어나가는데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기란. 그냥 즐기는 게 맞다. 조금 거리를 벗어나자 익숙한 관광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가 보였고 돌아서 루브르 박물관 옆을 지나쳐 저긴 오페라 가르니에 같기도 하고. 저긴 뭐였더라? 10년 전 첫 배낭여행에서 물집 잡히게 걸어 다녔던 파리시내. 그  한가운데 저 건물들을 보면서 달린다니, 우와, 이게 되는구나. 지화자. 얼씨구 좋다.


이전 08화 형제는 무식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