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제명 Jan 18. 2024

진짜로 갈 줄 몰랐어. Paris

2023 파리 마라톤.

'자도 자도 졸리는 긴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꿈이었던 것만 같은 파리 마라톤.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로 늘 꿈꿔왔었던 일이기에 꿈처럼 느껴지는 게 어색하진 않다' 문장에도 승모근이 있다면 있는 데로 딱딱하게 솟은 것 같은 이 문장은, 파리마라톤 직후에 쓴 후기의 시작 부분이다. 세상 오글거리지만 이미 박제되어버린걸. 저 정도까지 오글거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사실은 저 때 못한 말들이 아직 남아서 다시 쓰는 파리 마라톤 유랑기. 3년을 벼뤄서 다녀 온 여행이니 조금 더 우려 먹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곰탕의 민족이니

'앞으로 이어질 나의 달리기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평생의 추억, 10년짜리 안줏거리'. 이 문장 역시 여독이 풀리기 전 메모한 문장인데, 10년짜리 안줏거리는 개뿔. 1년이 다되어 가도록 사실 별로 얘기를 못했다. '파리까지 가서 마라톤을 뛰고 오셨다면서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으나, 신나게 대답을 하려고 하다가도 막상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회장의 분위기와 열기, 믿기지 않는 환대, 그리고 시속 10킬로의 속도로 흘러가던 파리의 풍경들을 적절히 옮길 문장들이 마음속에 쌓이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좋았어요'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하고는  '아 이 사람은 달리기에 관심이 없었지. 아니 나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었지.' 따위의 찌질한 생각들을 했었다. 그때 말로 못했던 자랑들을, 이제는 글로 풀어볼 계획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이 머쓱해지는 분야들이 있다. 주로 몸을 사용해서 하는 일들이 그러한데, 안타깝게도 나는 몸으로 하는 일조차도 책부터 찾는 편이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책과 유튜브로  달리기를 탐구하던 시절 읽었던 '아무튼, 달리기'.  작가님이 첫 풀코스를 파리에서 뛰면서 말 그대로 개고생 한 이야기를 써놓으셨는데(첫 풀코스는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역시 초심자의 자신감이 무섭다),

왜 거기를 뛰고 싶어 졌을까. 10년 전 보았던 파리의 개선문과 에펠탑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일까. 파리로 유학 간 후배의 '언제 한 번 오세요'라는 인사치레를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일까. 책을 읽자마자 밑도 끝도 없이 와이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 10주년에는 파리에 가서 마라톤을 하자고. 마라톤, 아니 달리기를 시작한 지 불과  한 달 남짓. 이제 5킬로를 겨우 뛰어본 실력으로 헛소리에 가까운 말을 한 것인데. 현실성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말이라 오히려 와이프의 결재는 수월했던 것 같다.

대회는 언제인지, 어떻게 접수하는지, 휴가는, 경비는?수많은 '어떻게' 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피니시지점을 향해 달려오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 버린걸. 멀고 먼 불란서 이국땅에서 사서 고생한 작가님의 후일담이 내 바람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 꿈이 되더니, 계획이 되었다.

3년이나 남았으니, 얼마나 많은 곳에서 허세를 부리며 계획을 떠들고 다녔을까. 같이 달리기를 시작한 후배부터 시작해서 달리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까지, '저 파리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결혼 10주년 기념이라, 완주하고 그 다음 날 바로 관광을 다녀야 해서 무리해서 빨리 뛰지는 않을 거예요.' '에펠탑을 지나서 개선문으로 들어온다던데 멋질 것 같지 않아요?' 여기저기 허세 가득한 계획을 떠벌리고 다니다 보니 가지 않으면 쪽팔려서 달리기를 그만둬야 할 지경. 일이  막상 그렇게 까지 커져 버리고 나니 그 뒤로는 파리로 가기 위한 '어떻게' 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물리칠 수 있었다. 아무튼, 결혼 10년 차가 되던 2023년 4월. 나는 개선문과 에펠탑을 배경으로 파리시내를 달릴 수 있었다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날, 엑스포라는 행사에 가야 했다. 기념품과 배번을 택배로 보내주는 우리나라 와는 다르게, 파리 마라톤은 택배 배송을 하지 않았고 대회참가를 위한 배번과 기념품을 직접 방문하여 수령해야 했었다. 옛날에 파리외곽을 지키는 요새였던 곳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 거기 어디의 체육관으로 가야 하는 상황. 부끄럽지만 불어는 0세 수준. 영어는 유아 수준이었던 나는 혹시나 내리는 곳을 지나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는 척, 졸지도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어야만 했었다. 아직 두 코스가 남은 상황이었는데, 불어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하더니 내리기 시작했고, 눈치 빠른 영국사람들도 따라 내리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을 보니, 족히 1킬로는 넘는 줄이 이어져 있는 게 아닌가.  눈치로 버텨온 직장생활 16년. 과감하게 한 코스 먼저 내리는 결정을 했다.


줄은 공원 밖으로만 1킬로가 넘었고, 공원 안으로도 짧지 않은 길이가 이어져 있었다. 눈대중으로 만 명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한껏 기대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숙소에서부터 달려서 온 것 같은 복장의 사람들도 있었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케리어를 끌고 온 가족들도 있었다. 파리 주민으로 보이는 복장의 아랍계 가족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아빠의 목마를 탄 꼬마는 신나서 까르르 거리는 반면에 엄마의 다리를 두 손으로 안고 선 큰 놈은 입술이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또 다른 걱정으로 마음고생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렵게 예약한 점심식사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혼을 기념할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이니 만큼 근사한 식사 한 끼는 하는 것이 인지상정. 출국 전에 후배를 통해 유명 유튜버가 소개했던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고, 와이프에게 영상까지 보여주며 생색이란 생색은 이미 다 낸 상황인데, 이 정도 속도로 줄이 줄어든다면 예약시간까지 맞춰서 갈 자신이 없었다. 초조함을 눈치챈 천사 같은 와이프님께서, '그래도 3년을 벼뤘던 일인데 기다렸다 배번을 받고 가자. 밥이야 다른 곳에서 먹어도 된다'라는 율령을 반포해 주시긴 했지만 여전히 안절부절. 다행히, 생각보다는 줄이 빨리 줄어들었다.


엑스포 행사장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직원들이 있었고, 아날로그지만 이상하게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십진분류법으로 책을 찾는 것처럼 5만 개가 넘는 배번이 여러 개의 부스에 나눠져 깔려있었고, 배번호가 적힌 이미지를 보여주자 1분 만에 내 배번과 기념품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동네는 아직도 네비대신 지도책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아날로그를 좋아 한다는데 그게 또 묘하게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이미 엑스포 장에서부터 축제는 시작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벽면 가득하게 쓰인 참가자들의 이름에서 본인 이름을 찾아 인증샷을 찍고 있었고,  스폰서인 스포츠 용품 관계자들이 진행하는 코스공략세션을 주의 깊게 듣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니시 장소인 개선문모형과 포디움 모형은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기 위한 부스와 팝업스토어들이 나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고생할 정도로 많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며 놀고 싶었지만, 조금만 서두르면 식당 예약시간을 맞출 수 있을 타이밍. 눈치 빠르게 빠른 걸음으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약속을 금처럼 여기는 대한민국의 모범시민으로써 아키히로 셰프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전 09화 진짜로 뛸 줄 몰랐어, Paris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