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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Mar 21. 2024

형제는 무식했다.

2024 동아일보 서울국제 마라톤

무식하면 용감하다. 달리기에 관한 한 우매함의 봉우리에 머물러 있던 동생의 무모함과, 몇 번의 완주로 안이해진 나의 마음이 일으킨 시너지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재앙의 전조. 고통의 서막. 아마도 그놈의 TV 프로그램이 문제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기안 84도 완주를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있을까?”


“어 못할 건 없지. 한 달에 300킬로미터 정도씩 3달 정도 뛰면 가능해. 정 부담스러우면 200킬로미터 정도라도 마일리지를 늘려둬”


한 달에 100킬로미터도 달려본 적 없는 동생에게 책에 적힌 얘기를 했다. 포인트 훈련을 제외하고라도 마일리지를 늘리는 것 역시 단순히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장 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천천히 거리를 늘려 나가야 한다. 서두르면 오히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정직한 과정. 거기에 대한 세밀한 고민이 없었다. LSD를 해라. 대회 전에 최소 35킬로미터까지는 뛰어봐라. 대회 당일도 35킬로미터 정도까지만 뛸 수 있으면 나머지 거리는 걷다가 뛰다가 해도 완주는 가능하지 않겠나. 거리를 늘려라. 매일 뛰어라. 이런 뭉툭한 조언들만 했으니... 마음만 앞서 무작정 거리로 나선 동생은 어느 순간부터 지속적인 부상과 싸우며 체외충격파의 단골 고객이 되었고, 부상 이후에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충분한 회복 기간을 가지지 못하고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 결과, 월 100킬로미터도 안 되는 수준의 마일리지를 겨우 쌓았을 뿐. 그나마 대회 전의 1개월은 50킬로조차 뛰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사실 대회를 포기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 하지만, 10만 원에 달하는 참가비는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금액이었고, 추운 겨울 찬 바람을 맞아가며 달린 거리와 시간들은 더더욱 아까웠기 때문에, 그래서 일단은 나서 보기로 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니까.


나 역시도 작년 가을 이후 너무 마음 놓고 쉬어 버린 탓으로 이미 몸은 달리기의 흔적을 찾기 힘든 지경으로 돌아가 있었고 작년 수준으로 뛰는 것조차 이미 불가능한 상황. 안될 것 같은 마음에 뛰고 싶은 마음은 사라져 갔고, 부족한 훈련과 동기부여는 또 악순환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번은 동생의 첫 풀 코스 가이드 러너로 참여하는 것이니, 그러니까 빨리 달리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훈련 하루쯤 쉬는 것도. 술 한 잔쯤 더 마시는 것도, 대회 전날 저녁에 소주 한 잔 하며 토트넘 새벽 경기 중계를 보는 것도 뭐 그 정도는...   그런 소소한 ‘쯤’과 ‘정도’가 모이다 보니 보너스 나오는 달 카드 값처럼 차곡차곡 거대하게 쌓인 ‘못 뛸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하프 정도까진 좋았다. 첫 풀 서브 4를 목표로 했기에 5분 30~40초의 페이스를 놓치지 않고 달렸다. 중간중간 깝치며 빨라지는 동생도 말렸고, 타이밍 맞춰 에너지 젤도 같이 먹었다, 마그네슘도 주고, 오르막과 내리막에서는 피치를 바꿔가며 달리기도 했다. 35킬로 지점까지만 어떻게든 버티자. 그리고 상황이 허락한다면 서브 4를 밀어보자. 이런 생각을 계속하며 버티던 시간. 25킬로 미터 급수대를 지나면서부터 애가 약간 이상했다. 물을 두 번이나 마시고도 포카리를 또 마신다. 연가시가 들린 것 같다. 젤을 먹은 지 3킬로미터 밖에 안 지났는데 또 뭔가를 찾는다. 지니고 있던 젤과 크램픽스를 줬다. 등 뒤에 있던 카페인을 꺼내다가 어깨에 쥐가 났다고 한다. 거칠어진 호흡이 옆에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결국 29킬로 지점이 되자 동생은 멈춰 서고 말았다. 아픈 건 아닌데 어지러워서 뛸 수가 없다고 했다. 욕심에는 5킬로미터만 더 갔으면 했지만. 저게 엄살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은 같이 걸으며 호흡을 회복했다. 그리고 나서부터 엄청나게 계산을 했다. 컷오프는 다섯 시간. 지금껏 달린 거리는 29킬로미터 소요된 시간은 3시간 정도, 120분 만에 13킬로를 달릴 수 있을까. 이 속도로 걷는다면 페이스는 12~13분. 중간중간 뛰지 않으면 컷오프는 무리. 500미터쯤 걷다가 200미터쯤 느리게 뛰기를 반복했다. 페이스는 7분 언저리, 쥐가 심하게 올라온 35~9킬로미터 구간은 9분대까지. 힘들고 느리지만 꾸역꾸역 피니시를 향해 나아갔다. 4킬로미터를 남긴 시점 이제는 13분 대로 걸어도 완주는 한다. 걷자고 했다. 나도 이제 다리에 쥐가 올라오고, 에너지 젤도 없고. 고마 그냥 완주만 하자고 했다. 그 정도로 마무리했어도 사실 별 차이는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동생은 연가시에게 뇌까지 먹힌 것 같았다.


“햄아 7분대로만 계속 뛰면 4시간 30분 가능할 거 같다.” 그러고는 뒤뚱뒤뚱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는 4시간 30분과 40분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해놓고 동생 보다 뒤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꾸역꾸역 쥐가 나지 않은 근육을 써보려 애쓰며 앞으로 달려갔다. 동생은 진심으로 4시간 30분을 원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도 걷다 뛰다 하던 놈이 40킬로미터를 넘어서고 나서는 느리더라도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쉽지만은 않아 보였지만. 일단 따라 뛰었다. 42킬로미터 지점에 임박해서야 동생을 따라잡았고 그렇게 코너를 틀자. 갑자기 피니시 라인이 나타났다.


‘ 아 피니시가 운동장이 아니구나..’


잠실 트랙을 돌며 박수를 받을 기회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힘들어 죽겠는데 그냥 빨리 끝나서 다행인가. 모르겠고 그래도 내 앞의 사람은 따라잡고 싶다. 조금만 움직여도 쥐가 올라오던 몸뚱이였는데, 피니시 라인이 보이자 무의식 속에 꽁쳐뒀던 힘이 일시불로 터져 나왔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다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스는 4분 초반. 세상에 내 몸뚱이가 낯설어지는 순간이었다. 즐겁게 웃으며 손도 흔들어 가며 피니시를 하고, 들고뛰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동생의 첫 풀 코스 피니시는 찍어줘야지.. 동영상을 찍고 싶어 모드를 바꾸는 사이 동생이 들어왔다. 4시간 29분 51초. 잔뜩 못생긴 사진만 겨우 남긴 피니시였다.


[42킬로를 핸드폰을 들고 뛰었는데 이상한 사진 하나 찍어주고 끝]
[다행이 아는 사람들이 찍어준 사진이 남았다]
[이렇게 멱살잡고 끌고 갔지만, 사진 안찍어줬다고 뭐라하는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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