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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Jan 11. 2024

더닝 크루거 곡선은 과학이다.

2021년 울산 태화강 국제 마라톤은 전례 없이 많은

2021년 울산 태화강 국제 마라톤은 전례 없이 많은 달림이들이 모인 축제의 장이었다. 2년 전 시작된 코로나와의 질긴 인연의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코로나는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유행들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너무 오랜 시간을 각각의 자리에서 견뎌야 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진짜 끝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만에 처음으로 열린 풀코스 로드 레이스. 달리기라는 것을 시작한 지 아직 1년도 안된 시점, 풀코스를 꿈꾸기엔 말도 안 되는 훈련량과 몸 상태였지만. 역시나 더닝크루거곡선은 과학이다. 무지를 배경으로 한 초심자의 자신감으로 덜컥 풀코스를 신청해 버린 것이다. 20년 전의 창원 이후로, 처음으로 나서는 로드 마라톤 대회는 얼마나 신날까? 그렇다면, 10킬로만 뛰고 오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아직 두 달의 시간은 남아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래도 여름에 하이원이며 영남알프스며 산속을 뛰어다녔으니 조금은 강해 졌겠지.

 

서울에서, 광주에서, 대구에서, 또 전국 어딘가에서 모인 수 만의 러너들은 행사 전날부터 울산 시내를 북적이게 했다. SNS를 통해서만 서로를 응원하던 수많은 러너들을 직접 만나는 기쁨이란. 달림이들은 본디 외향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쭈뼛대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10년은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밝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에 주눅이 들기도 했었다. 사실 울산은 회사일로 40개월간 머무른 적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나름 잘 아는 도시,  제3의 고향쯤은 되는 곳이라 여겼건만. 그날의 울산은 너무도 낯선 곳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생명의 숲 지키기 캠페인을 했던 태화강 수변 공원이 대회의 출발이자 피니시장소였고,  포켓몬고에서 피카추를 처음 포획한 대내무 숲길 역시 대회 코스의 일부였다. 호젓하게 걸으며 스트레스를 내려놓던 그 길을 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뒤뚱뒤뚱 뛰어가다니. 불과 2년 전에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이 정녕 반갑고 기쁜 일이 될 줄을 몰랐던 것처럼, 걷기만 했던 이 길을 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당시의 영상들을 보면 나는  진짜로 뒤뚱뒤뚱이 어울리는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몸이 지금보다 무거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좌우의 불군형과, 골반의 가동범위의 현격한 불량 때문에, 불안해 보이는 자세로 좌우로 흔들리며 달렸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한 번의 쥐 없이 완주하는 첫 번째 풀코스 마라톤이 있을까? 대회전 달려봤던 가장 긴 거리인 25킬로미터가 지나자마자 급격하게 체력은 고갈되었다.  28킬로 지점 정도부터는 출근길 동서고가도로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했고, 32킬로 미터. 피니시를 10킬로 미터 남긴 지점부터는 태어나서 처음 허벅지 뒤쪽에서 종아리까지 다리 한쪽이 전부 쥐가 나더니, 조금 걷다가 반대쪽 다리에 쥐가 나고, 결국 양다리에 쥐를 주렁주렁 매달고, 뿅망치로 두더지를 잡듯이 주먹으로 허벅지를 두드려 가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10킬로 미터를 남긴 시점에 컷오프까지 2시간이 남은 상황. 걸어도 기어도 도착은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첫 풀코스 완주까지, 킬로미터당 10분의 페이스로 걸어서라도 가면 성공인 상황. 어떻게든 가면 되는데, 그 어떻게가 이렇게까지 곤혹스러울 일인가. 가야 하는데 못 가는 이의 심정은 얼마나 초조하고 안타까운지. 숨 쉬는 것만큼 일상적인 걷기라는 행위가 알고 보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나머지 1시간 40분.


자꾸 올라오는 경련 때문에 1킬로미터를 10분에 가기도 버거웠던 상황. 반환점을 찍고 오는 동행한 동생을 지나쳤다. 저 친구가 남은 거리는 2.5킬로미터. 나는 10킬로미터.  후달렸다. 똑 같이 첫 번째 풀코스 도전을 하는 주제에, 먼저 들어가게 되면 꼭 피니시 지점에서 내가 들어오는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둔 상황이었고,  속도면 그 친구는 42킬로 미터의 거리에 시달린 다리를 이끌고 1시간은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지루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더하기 빼기 가끔 나누기 같은 산수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그 당시의 시간도 엄청 고통스러운, 더럽게 안 가는 시간이었으므로... 계산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그 친구는 1시간을 나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추운 11월 울산 강바람을 맞아가면서.  누군가 준비한 막걸리도 한 잔 못 마시고.  달리기를 하다 보면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들이, 갈 때의 호기로움이 올 때의 후회로 바뀌는 일들이 종종 생기곤 한다. 나 스스로의 컨디션을 가늠할 수 조차 없었던 초창기에는 더더욱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는데, 그 최대의 피해자 중의 한 명이 그날 1시간 넘게 강바람을 맞으며 벌을 섰던 호구라는 친구다.

<처참한 몰골이지만 따봉은 못참지. 호구와 1시간 넘게 차이나는 기록>

허벅지에 올라온 쥐를 움켜쥐고 태화강 둔치를 사이좋은 좀비처럼 비틀대던 다른 참가자들도 하나 둘 나를 지나처 가고, 날은 춥고 땀은 식고. 도대체 호구는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계산도 안 되는 상황. 마지막 피니시 직전의 그 나선형으로 꼬불꼬불 내려가는 다리는 도대체 왜 코스에 넣어둔 건지 아직도 모르겠고. 완전히 털린 다리로 꾸불꾸불 내려오는  고난의 행군. 나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기다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메달만 겨우 챙겨서 쫓기듯 출발했어야 했던 태화강 국제 마라톤. 걷기도 힘들었던 다리였지만 다행스럽게 엑셀과 브레이크는 밟아져서. 집에까지 겨우겨우 오는 길.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에. 효과 좋은 진통주사를 맞은 것처럼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금세 사라져 버리고 자기 긍정의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이제 나는 풀코스를 달려본 사람. 대한민국에 풀코스 완주를 몇 명이나 했을까. 이번에 워낙 기록이 안 좋으니 다음번에는 무조건 경신은 하겠다.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걷지만 말고 뛰어가자. 한 번은. 그 한 번이 또 한 번이 되고 한 번 만이 되고... 그렇게 계속되는 도전과 후회로 어찌 되었던 아직 달리고는 있으니. 뭐 그 정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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