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제명 Mar 10. 2024

트레일 러닝, 오히려 좋아.

2022년 운탄고도 스카이 레이스

달리기는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운동이다. 전신을 사용하는 운동이기에 순간순간 이어지는 몸에 움직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사이 나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일종의 동적명상상태에 빠진다. 순수하게 자신에게 몰입하는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몰입의 즐거움'으로 유명한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 박사가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이라고 콕 집어 책을 한 권 더 냈을 정도다. 동적명상. 주리가 틀려서 5분도 앉아있기 힘든 사람도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가 달리기이다.

하지만 달리는 사람'들'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긍정의 에너지와 에너지가 융합되며 폭발한다. 분열에 기반한 원자폭탄보다는, 융합에 기반한 수소폭탄이 더 강력하지 않던가? 즐거움이 넘치는 달리기의 축제를 생각할 때 1초의 버퍼링도 없이 하이원 스카이 레이스가 떠오른다. 이제는 '운탄고도 스카이 레이스'라고 부르는 한 여름의 축제는 강원도 정선 하이원 스키장의 여름철을 빌려 진행되는 트레일 러닝 대회다. 여름에도 시원한 강원도 지방에서 나무 그늘과 임도를 달리는 이 대회는. 국내 모든 달리기 대회를 통틀어 가장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자랑한다. 양일간에 걸쳐서 진행되는 행사장에는 각종 운동용품들을 판매하는 부스는 물론, 인스타 땔감으로 쓰기 좋은 여러 가지 조형물과 사전행사들이 가득하다. 거기에 행사 진행을 도맡아 하고 있는 망키님의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면, 누구라도 축제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회과부도로 지리를 배웠던 나에게 정선은 태백 옆의 탄광 도시 었고,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카지노의 도시였다. 카지노의 도시 정선은 나에게 겸손을 알려주었을 뿐이지만, 운탄고도 레이스의 정선은 나에게 트레일 러닝의 기쁨을 알려 준 곳이다. 사실 첫 트레일 러닝을 이곳에서 경험하게 된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는데, 너무나 많은 CP(체크 포인트, 식량 보급과 정비를 진행하는 포인트)에 모든 대회가 이 정도 수준의 서포트를 해줄 것이라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 참여한 트레일 러닝 대회들은 운탄고도의 절반도 안 되는 CP를 운영하면서도 더 높은 난도의 코스로 구성된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용감하게 참여했던 부산 5 산종주 대회에서는 수많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나 혼자 조난당한듯한 몰골로 “죄송합니다만. 물 좀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를 연발하기도 했었다. 평소라면 음식이 잘못 나와도 말 걸기가 두려워 그냥 먹는 사람인데, 죽을 거 같으면 '물 좀 주소'를 외치게  되더라.


산을 달리는 일은 도로를 달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또 많이 다른 운동이다. 확실히 자유형과 평형정도의 차이보다는 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우선 42.195km를 내내 달려야 하는 로드 마라톤과는 달리 트레일 러닝에서는 뛰다 걷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산 달리기는 몇몇 고수에게나 해당하는 용어이고 나 정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등산+내리막 달리기 정도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쓰는 근육들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로드 마라톤이 주로 다리의 뒤쪽 근육을 사용한다면 트레일 러닝은 앞쪽 허벅지와 심지어 양팔의 힘까지 사용한다. 그리고 트레일 러닝에서는 코스의 길이만큼이나 총 획득고도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얼마나 많은 오르막을 오르느냐에 따라서 대회의 난이도가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이원 20K가 총 20K의 구간동안 누적 상승 1,005m의 적절한 오르막이 있는 무난한 코스였다면, 영남알프스에서 개최된 하이트레일 대회(2 peak)는 거리는 26k로 비슷했지만 누적상승고도가 거의 2,000m에 가까운 수준이었고, 결과적으로 완주에 걸린 시간도 2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 추가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산을 달리는 행위가 주는 기쁨도 많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아름다운 풍광과 신선한 공기, 트레일 러닝용 신발과 조끼 같은 새로운 장비를 살 수 있다는 명분, 결국 해냈다는, 드디어 도시의 땅으로 생환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일반적인 기쁨이라면. 앞서 얘기한 동적명상의 상태. 몰입감은 나에게 커스터마이징 된 즐거움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유명한 겁쟁이인 나에게 홀로 달리는 좁은 산길은 사실 공포의 대상이다. 작은 풀소리에 산짐승이 나타난 건 아닐까 화들짝 놀라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고, 썩은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여 '엄마야'라고 몇 십 년 만에 외쳐보기도 했다. 종아리에 스치는 풀의 감촉이 무서워 도망치듯 달리다 보면 심장은 어느새 풀악셀급으로 쿵쾅거리고, 다리에는 쥐가, 발바닥에는 통증이 넘처나기 시작하는데, 그 정도의 상태가 되면 오히려 신기하게도 강한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모든 감각이 곤두서있는 그 불편한 순간이 남기는 묘한 감칠맛이 있다. 명상을 할 때 가이드가 계속 강조하는 지금, 여기에서 나를 인식하는 일. 그 선명한 몰입감은 조난에 가까운 고난의 기억도 순식간에 미화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분명히 '다시는 산에서 뛰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해야지'라고 뛰는 내내 마음을 다지고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다음 대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산에서 뛰다보면 멈춰서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이전 04화 백제를 달리는 즐거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