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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Jan 27. 2024

아무튼, 다행히, Paris

2023 파리 마라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라톤을 뛰다 보면 자주 울컥하는데, 이번에는 출발하자마자 감정이 솟구쳐서 호흡이 힘들었다. 오래 꿈꿔왔던 대회를 마침내 달리고 있다는 감동이었는지. 아름다운 파리의 건물 사이를 달리는 기쁨이었는지, 처음 듣는 말이지만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수많은 시민의 뜨거운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는지, 그 모든 것 때문이었다면. 각각의 이유가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호흡을 잠식했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긴 레이스를 이어가기 위해선 감격에 겨워 거칠어진 호흡은 방해가 될 뿐이었고, 아직 초보러너인 나는 억지로라도 감정을 정리해야 했었다. '이대로라면 완주가 힘들 수도 있다.' '일단은 몸이 그렇게 무겁진 않으니 약속한 25킬로 지점까지는 예정대로 5분 페이스로 뛰어보자.' 이런 생각들로 페이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했고, 유명한 관광지들이 모인 거리를 지나자  어느 정도 페이스가 일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되었다.


'파리마라톤의 주로는 생각보다 언덕이 많은 코스였던 것이다. 대부분 평지로 구성된 울산과 서울에서의 레이스에서는 언덕은 한 두 개 그냥 지나가는 이정표 수준의 느낌이었고, 그래서 오르막과 내리막보다는 평지를 꾸준히 밀어내는 능력이 중요했었다. 그에 비해 누적 상승고도 450미터의 파리 마라톤은 대도시에서 진행되는 대회 치고는 난도가 있는 편이었다. '


라고 후기를 써놓았는데 글을 작성하며 과거 기록을  찾아 검증해 보니 그때는 너무 준비가 안되어 힘들게 느껴졌을 뿐.  그렇게 인상적으로 힘든 코스는 아닌 것 같다. 참고로 울산 태화강 마라톤은 170미터, 2022년 JTBC 450미터 23년 서울동아 430미터, 언덕이 많기로 유명한 춘천마라톤은 639미터의 총 상승고도가 기록되어 있다. 다시 한번 아무튼, 2주 전 서울 대회를 마친 후 주로보다, 술자리를 더 자주 달렸던, 심지어 대회 전 날까지도 약간의 와인으로 적셔졌던 내 몸은 몇 번의 언덕을 거치며 급격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10킬로를 조금 넘겨 파리 외곽의 동물원 비슷한 곳을 지날 때부터는 나중에 걷더라도 하이파이브를 약속한 25킬로 지점까지만 밀어보자 이런 생각으로 계속 버텼던 것 같다. 그리고 힘이 빠질만하면 고적대가 행진곡을 연주해 주거나, 록 밴드가 노래를 하거나 하는 포인트들이 나타났는데  그 음악들이 예상외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달릴 때에는 아무것도 듣지 않고 혼자 잡생각들을 하는 쪽이다. 귀에 무언가를 꽂고 달리는 느낌이 어색해 골전도 이어폰도 사용해 봤지만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워, 내 숨소리와 발소리를 들으며 멍한 상태로 달리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날에서야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음악이, 리듬과 비트가 에너지를 일으켜 준다는 사실을. 그래서 전쟁의 대열 앞에서 북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행진곡이라는 장르가 생겨났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레이스의 전 구간에 걸쳐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각종의 음악대들이 쉬지 않고 연주로 에너지를 전달해 줬었다. 심지어 센 강옆의 지하 터널을 지날 때는 EDM비트가 쿵쾅쿵쾅 거리기도 했는데, 적지 않은 수의 주자들이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춤을 추기도 했었다. 또 다른 터널 입구에 있던 드럼 연주자들은 터널을 달리는 내내, 반대편 출구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을 실어 북을 쳐주기도 했었다. 그런 음악만큼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게 놀랄 만큼 많은 파리 시민들의 응원이었는데, 파리 인구 전체가 시내로 나온 느낌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리를 가득 채운 시민들이 쉴새 없이 '알레알레'를 외쳐주었다. 박스를 잘라 버섯 그림을 그려놓고 그 밑에 touch, super power 이런 글들이 쓰인 손 피켓을 들고 나온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슈퍼마리오의 먹으면 커지고 빨라지는 그 버섯을 뜻하는 듯했다. 그 보다 작은 친구들은 한 손을 높게 들고 지나가는 주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아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 조건 없이 응원을 해주는 건가.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인데 살며 받은 응원과 칭찬보다 더 많은 응원을 단 몇 시간에 받았다. 진짜로 뜻도 모르는 말들이었지만 완벽하게 전해지던 마음들. 함께 달리는 러너들도 순위보단 대회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힘들어 걷고 있으면 어깨를 쳐주며 이제 저스트 1마일이라고 외쳐주던 미국인 아저씨도 있었고, 간바레와 짜요를 외쳐주던 동양인들도 있었다. 한 번도 파이팅이라고 외쳐주는 사람은 없어서 다음부턴 외국에는 태극기를 달고 뛰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5킬로 지점에 겨우 도착했지만 만나기로 한 일행이 없었다. 많은 인파사이에서 혹시나 놓칠까 속도를 늦춰 뛰기까지 했는데 찾을 수 없었다. 타이밍이 안 맞은 것 같다. 이제 피니시에서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어떻게든 25킬로 지점까지는 버틴다고 다짐하며 달려왔던 탓일까 아쉬움을 눌러 담고 계속해서 달리는데 힘이 나질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조금 한적해진 도로를 달리는데 '남편'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인파 속에서 엇갈릴 것을 걱정한 일행이 조금 인적이 드문 28킬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란서 땅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또 냅따 뛰었다. 5초도 안 되는 짧은 마주침을 위해서 그렇게 달려왔구나. 5초도 안 되는 시간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이렇게 힘이 나고 신이날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뒷모습이 안 보일 지점까지 자세에 신경을 바짝 쓰면서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다리에 쥐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직 30K도 안 되는 지점이라 많이 당황스러운 순간. 우선 인도로 이동해 스트레칭을 하며 잠시 마사지를 하고 다시 주로로 돌아왔다.  다시 힘을 내보려고 했지만 이내 쥐가 또 올라왔다. 도저히 빨리 뛸 수는 없는 상황. 결국 마지막까지 제대로 뛰지 못하고, 느리게 뛰기와 걷기를 반복했다. 걷기 시작하자 추위가 느껴졌다. 비는 그쳤지만 흐린 날씨에 땀이 식으면서 점점 추위가 매서워졌다. 아, 바람막이를 입고 뛰었어야 하는구나.


마라톤은 마지막까지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아주 레벨이 높은 사람이거나 그저 하루키책을 잘못 읽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걸어도 시간은 가고 거리는 줄어든다. 추위 속에서 지루한 걷기를 반복한 끝에 40킬로 지점을 넘어서며 진짜로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좀 편안해진 마음으로 좀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주로가 좁아진 탓에 느긋하게 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멈춰서는 순간 나만큼 힘들 뒷사람이 멈춰 서야 할 정도의 간격이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반쯤 울면서 마지막 골목을 돌아서자. 저 멀리 개선문이 보였다. 8차선은 넘어 보이는 대로변으로 수 천명의 사람이 모여있었다. 마지막 주로 길가에 설치된 광고판을 두 손으로 두드리면서 역시나 '알레알레'를 목이 터져라 외쳐주고 있었다. 거기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도 이빨을 깨물며 마지막 질주를 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올림픽 우승이나 한 사람처럼 두 팔을 높이 올려 만세를 부르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피니시 라인을 따라 쭉 들어가며 완주 메달과 피니셔 티. 사과와 머핀등을 받으며 정신이 돌아왔다. 감동스러웠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일단은 추워서 반팔티라도 하나 껴입고 주변을 보니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입구는 8개. 한 번 나가면 다시 진입하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있었다. 고작 160그람 줄이겠다고 핸드폰은 맡기고 출발한 터. 일행들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6세 수준의 영어를 풀가동 했다. 이러면 한국 대사관으로 가야 하나. 대사관이 영어로 엠버 뭐였던 거 같은데. 엠버서더인가... 그건 아니잖아... 이런... 큰일이군... 거기까진 어떻게 갈까.. 머리가 안 돌아갔고 날은 너무 추웠다. 다리도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든 상황. 그래 일행들도 나눠져서 나를 찾고 있을 거니 나라도 움직이지 말고 한 곳에 있어야 발견될 가능성이 있겠다. 그러면 제일 처음인 A게이트로 가자. 입구에 서서 감격에 겨워 집으로 향하는 수많은 러너들을 보며 10분쯤 떨고 있으니 '남편, 제명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덥석 팔을 잡으며 나타났다 '다행이다.' 이제 파리를 떠올리면 '남편'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대략 피니시 직후 상황, 핸드폰은 꼭 들고 뛰자]
[좌:피니시 지점에서 기념사진, 우:28킬로지점 와이프가 찍음]
[파리는 개선문을 향해 가는  피니시 지점이, 기념메달도 블링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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