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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May 15. 2024

Happily ever after.

2023년 춘천 마라톤

호반의 도시 춘천' 하면 먼저 떠오르던 기억은 10년 정도 전에 만들어졌다. 남이섬 록페스티벌이 열리던 날, 취재차 현장에 가 있는 동생과 통화하다 충동적으로, 낡은 겔로퍼를 타고 고속도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갔던 것 같다. 아무리 가도 끝나지 않는 하얀 낭만가도. 5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행사장에 겨우 도착했지만 결론적으로 남이섬 입장은 실패. 귀곡산장을 닮은 낡은 모텔. 채널도 몇 개 없던 티브이. 관광지 특유의 그저 그런 닭갈비와 막국수. 너무나 피곤한 밤. 다음날 또 주구장창 이어지는 하얀 길. 주유 중에 기름을 토해내던 낡은 갤로퍼. 휴게소 주유소엔 샤워장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날. 그러니까 갤로퍼가 토해내던 검은 기름으로 기억되던 춘천.


마라톤 기록의 기준을 정할 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일단 42.195km를 두 발로 지나오면 완주자. 그냥 달리는 러너에서 풀코스를 경험한 마라토너가 된다. 그러고 나서는 SUB4(4시간 이내 완주), 330(3시간 30분 미만) 싱글(3시간 10분 미만) SUB3(3시간 이내)의 단계로 나눈다, 3시간의 벽을 넘는 게 고수의 기준으로 본다. 많은 마일리지와 스피드를 올리기 위한 포인트 훈련들은 기본이고, 부상관리와 금주, 감량 같은 달리기 외적인 노력까지... 몇 개월의 시간을 달리기를 위해서 살아야만 가능한 기록이다.

[본문과 관련은 없지만 마라톤 훈련의 수학의 정석 느낌인 책]

가을 대회를 신청하고 목표를 정해야 하는데 고민이 생겼다. 올봄 서울에서의 기록은 3시간 35분. 330은 어찌 가능할 것 같은데 싱글은 아직 무리인 게 분명한 상황. 5분 단축은 너무 사소해 보이고 3시간 20분은 너무 어중간했다. 그래서 가을의 목표를 3시간 30분으로 하는 대신 난도가 더 있다는 춘천으로 타협했다. 성지순례를 얘기하듯이 춘천에서의 무용담을 풀어내던 사람들에 따르면. 춘천 마라톤은 멋진 호수가 옆에 있긴 한데 풍광을 즐길 여유는 없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언덕코스를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대로를 달리고 있다고. 평탄한 서울에서 달리는 것 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멋지고 터프한 코스라고, 그 코스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마라톤 좀 다녀봤네 말하기는 좀 그렇다고.


'그래 춘천에서 3시간 30분을 해보자.'


5분만 단축하면 되는 목표였지만 대회 준비는 열심히 했었다. 매월 달리는 거리도 최소 200Km 이상은 뛰려고 노력했고, 술도 참 많이 줄였다. 체중도 4킬로 내외 줄이고, 포인트 연습도 주 2회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썼다. 시계의 알람을 200미터 단위로 맞추고 55~8초에 맞춰 뛰기를 연습했다. 그렇게 달리기만 하다 보니 대회를 한 달쯤 앞두고 나서는 달리기가 질리는 순간도 찾아왔다.


'대회가 끝나면 이제 풀코스는 뛰지 말자.'


'경치 좋은 곳 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며 즐겁게 하자.'


'술을 건강하게 먹고 싶어 시작한 달리기인데...'


'아 진짜 하기 싫다. 하기 싫다.'


그다지 도움 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생각 없이 주어진 훈련을 소화하려 애썼다.


달리기도 정직하고 몸도 정직하다. 버텨낸 지겨움과 통증의 양에 비례해서 속도가 많이 좋아졌다. 대회를 보름정도 앞두고 실시한 점검훈련에서 목표한 시간을 버텨냈다. 대회 페이스로 5킬로를 달리고 5분 휴식한다. 중간에 휴식이 있으면 다리가 무거워지는데 그렇게 4세트 정도 지나면 다리가 잠기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2세트를 더 뛴다. 그렇게 6세트를 달리는 동안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면 대회 때도 가능하다. 이제 잘 올라가면 된다.


역시 춘천은 멀고 먼 도시였다. 동대구까지는 기차. 그 이후에 고속버스로 환승했다. 아침 먹고 출발했지만, 도착하니 저녁시간이다. 내일 춘천에서 점심 먹고 부산으로 출발하면 새벽에 도착할게 뻔한데... 벌써 피곤하다. 다음 날 휴가라도 낼 걸. 대회장과 2킬로 남짓 떨어진 호텔에서 방을 잡고 마지막 카보로딩을 했다. 피자와 콘샐러드를 시간을 들여 많이 먹었다. 전해질이 부족할까 포카리스웨트도 1.5리터를 사셔 마셨다. 대장내시경을 준비하던 전날밤과 비슷한 기분. 자다 일어나 깨서도 포카리는 마셨다. 마치 부적처럼.


아침은 추웠다. 싱글렛을 입기엔 추웠던 게 아닌가. 출발 전에 약한 기색을 보일 수는 없는 법. 오히려 활기차게 웃으며 인사하고 몸풀기를 잠시. 유명한 연예인들 주위로 잠시 웅성웅성. 드디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초반의 길은 좁고 가팔랐다. 무리하지 말자고 마음을 너무 강하게 먹은 탓일까. 사람이 밀렸던 탓인가 보통은 눌러야만 했던 페이스가 이번엔 20초나 늦었다. 조금 올려야지 했는데 오르막, 오르막에서는 조금 밀려도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정작 내리막에서도 페이스가 계획대로 회복되지 않자 불안한 풍선처럼 부풀어갔다. 몸 안에 부풀어진 풍선덕인지 5킬로미터 지점이 지나고 나니 몸이 가벼워졌다. 주로에 주자들도 줄어서 주행에 방해도 줄었다. 겨우 페이스를 잡고 정신을 차리니 호수가 보였다. 이걸 한 바퀴 돌고 나면 절반쯤 끝나는 것일까? 상하좌우로 구불구불하게 굽어진 도로를 생각 없이 달렸다. 10킬로 근처를 지나자 출발 전에 인사한 친구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나를 지나쳐 갔다. 페이스는 계획대로다. 저 친구들은 저 친구들이 가야 할 페이스로 찾아가는 것일 뿐. 저기에 휩쓸리지 말자. 아직 1~2분 여유가 있다. 고만고만한 언덕들을 견뎌내고 나니 하프반환점인 신매대교가 나왔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 춘천까지 누군가를 응원하러 와있었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 목이 터져라 파이팅을 해주는 걸까. 힘이 난다. 주변이 술렁술렁. 평소에 부산에서 썬탠주를 즐기며 유튜브를 찍는 정두식 님이 내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 아저씨 같은 '자, 가자'하는 멘트를 한 참어린 친구들이 따라 한다. '자 가자'. 덕분에 나도 휩쓸려 하프코스를 돈다. 다시 좁아지는 농로. 은근한 오르막과 은근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두식이 아저씨는 3시간 30분 페이스 메이커 팀에 끼어 내 앞을 지나간다. 저길 따라가야 3시간 30분인가? 아니다. 저긴 나보다 5분 먼저 출발한 팀이니 아직은 3시간 30분이 가능하다. 아직 2분 여유 있다. 그렇게 간단한 산수를 복잡하게 암산하다 보니 저 멀리 하늘 근처에 끝이 보이는 긴 다리가 나왔다. 이건 무슨 오르막이 얼마나 긴 건가. 서상대교에서 춘천댐으로 이어지는 무려 2킬로미터짜리 오르막. 진짜 천국으로 가는 다리구나. 걷지만 말고 버텨내자. 무릎만 들면 된다. 보폭은 짧게 팔도 골반 근처로 내리고 팔꿈치와 무릎을 짧게 움직이며 호흡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냥 무릎을 앞으로 들면 바닥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해볼 만 한데, 고개를 숙이고 지루하게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10킬로 정도를 앞에 가던 철인 3종 패밀리들이 내 뒤로 밀려났다. 장유에서 오셨던 아저씨도 이제 따라잡았다.


'어 나 의외로 오르막 잘 달리는걸. 럭키.'


이제는 내리막인데, 신나게 쏘면 되는데. 햄스트링에 느낌이 온다. 무조건 페이스를 잡아야 한다. 빨라지거나 느려지면 바로 쥐가 올라올 거라는 걸 직감했다. 골반만 앞으로 밀자. 에너지젤도 크램픽스도 없다. 이제 벌어놓은 시간도 없다. 그래도 페이스를 끝까지 놓지 않으면 할 수는 있다. 앞으로 가자. 저 멀리 피니시가 보인다. 또 사람들의 환호가 커진다. 내 뒤에서 마리오 분장을 한 주자가 질주를 시작했다. 지기 싫어서 페이스를 올려보려다 경련이 느껴져 이내 멈췄다. 마리오는 보내줬다. 그대로, 처음 잡은 페이스 그대로 가자. 개 ×발, 다했다. 다 달렸다. 이제 안 뛰어도 된다. 이제 술만 마실 거다. 존나. 3시간 29분 10초. 올해의 달리기는 다행히 성공적. 그리고 진짜로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Happily ever after.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뛰었을까. 그래도 23년 정말 즐겁게 잘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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