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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woong Jun 30. 2016

인터페이스 연대기 <1장>

전쟁과 디자인

이 글은 프라모델이라는 친숙한 오브젝트로 우리를 전쟁의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변신합체 로봇은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전시했던 반면, 밀리터리 프라모델의 세계에는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심미적 매혹을 발산한다고 소개한다.


밀리터리 프라모델에 방향을 맞추어 글은 진행되며, 2차 세계대전이 등장한다. 

당시 투박하고, 심미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디자인을 보였던 연합군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독일군의 경우는 반대로 아름다움에 매우 신경을 많이 썼다.


독일군의 군복이나, 화기에서 탱크까지 연합군보다 눈길을 끌게 잘 만들어진 것들이다. 

영화를 보아도, 연합군보다는 독일군이 더 위엄 있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나치군의 군복


연합군의 군복

작가는 이런 시점을 선악의 도덕적 판단과 디자인의 미적 우열이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공유하고자 한 것 같다.




전쟁과 디자인, 전쟁은 파괴의 성격을 보이지만, 디자인은 공동체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성격을 보이는 것처럼 둘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디자인 역사가들은 전쟁과 디자인의 관계에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영국 출신의 '존 헤스켓'정도가 유일하달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전쟁 기계들을 언급하며, "공포의 미학은 거의 논의되지도 않았고 잘 알려진 바도 없지만, 강력한 군사 무기의 비인격화된 형태는 우리 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지고 강한 환기력을 지닌 이미중 하나이다."라고 주장한다.


독일 측의 디자인이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기술적 미학적 완벽성에 집착한 반면, 미군 측의 디자인 원활한 부품 수급과 단순화된 조립 과정 같은 포드주의적 생산 방식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헤스켓의 논의를 뒤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생각하듯이 전쟁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란 선전 이미지를 제작하거나 살상 무기와 군수물자를 디자인하는 일에만 제한되는 것일까?


전장에서 수집된 수많은 정보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활용하는데, 시각화의 전문가인 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작가는 이 질문을 '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의 전쟁상황실 프로젝트'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 윌리언 도너반을 불러들여 전략 정보국을 창설하고, '매일 전 세계의 전장에서 워싱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를 어떻게 명료하게 정리해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느냐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도너반은 자신의 춘기운 애서튼 리처즈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부탁했다. 


리처즈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메리안 쿠퍼의 조언을 받아 크게 두 가지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하나는 대통령의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정보를 시각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 즉 최신 기술로 중무장한 대통령 전용 전쟁상황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략 정보국 산하에 군사 정보의 시각화를 전담하는 시각 프레젠테이션 부서를 설힙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리처즈가 전쟁상황실을 구상하면서 1939년 뉴욕 박람회를 떠올렸다는 점이다. 

뉴욕 박람회는 당시 대공황의 우울한 그림자를 지워내기 위해 거대한 테마 파크의 형식으로 미래의 모습을 화려하게 구현해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대통령 직속에서 합동 참모부 산하로 개편되면서, 크게 힘들어졌다. (투자 절감)

결국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방향과 많이 벗어나자, 많은 디자이너들이 떠났고, 그 자리를 젊은 디자이너들이 채워나갔다. 그들은 무기 사용법 설명서, 선전 인쇄물, 통계표, 그래프, 작전 지도 등의 여러 인쇄물을 제작하였고 오늘의 '정보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분야의 초석을 확실히 닦아놨다.




반면 독일군은 쌍방향의 통신 장비활용과 이니그마 암호 해독기 덕분에 전쟁상황실에서 대륙적인 규모로 전쟁 기계들의 집단 군무를 지휘하는 안무 감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폴 비릴리오는 독일군의 작전 수행과정을 두고 "명령의 오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지자 베를린의 상황실은 오합지졸이었고, "테이블에서 작전 명령을 주관하는 것은 판타지였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히틀러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러한 판타지에 생생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 최전방의 전투 상황을 녹음한 현장음을 전쟁상황실에 배경음악으로 틀어놓기도 했다.


이런 퇴행적 상황은 영화 <콜베르크>의 제작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소련군의 대반격으로 동부 전선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음에도 괴벨스는 부족한 엑스트라들을 충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보병 187,000명과 해군 4,000명을 동부 전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콜베르크


이 영화는 히틀러와 괴벨스가 대중에게 미칠 심리적 효과의 측면에서 이 영화의 성공이 어떤 군사적 승리보다 값질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전쟁의 총체예술"이라 하겠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당시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의 시나리오가 소련 전폭기의 동시다발적인 선제 핵 공격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대한 대처로 Semi-Automatic Ground Environment(SAGE)라는 이름의 '대공방어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SAGE 기지
Lightpen
CRT Screen

이 시스템은 미국 전역에 배치된 23개의 레이더 지역 기지들의 통합 네트워크다.

이 시스템 덕에 CRT 모니터와 라이트 팬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SAGE 시스템은 탄도미사일의 등장으로 쓸모없게 돼버린다.  하지만 여러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특히 디자인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컴퓨터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인터페이스'의 등장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통령의 과학 정책 조언자로서 군산복합체의 형성에 깊이 관여했던 '베니버 부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라는 글에서 '메멕스'라고 불리는 하이퍼텍스트 구조의 정보 시스템을 제안하며, 인터렉티브 미디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리고 부시의 글의 영향을 받은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1960년대 초에 "인간 지능의 확장"을 위한 온라인 컴퓨터 시스템을 구상하게 된다.


엥겔바트의 온라인 시스템을 필두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 위한 실험과 담론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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