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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l 06. 2019

6월 14일, 12일 차, 프라하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프라하입니다.

아침부터 영 몸이 좋지 않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둥키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저께 맞은 비가 이제야 감기 기운으로 올라오나 봅니다. 몸도 무거운데 어제 환전상의 위압적인 이미지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도무지 침대 밖을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호텔에 누워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다 보면 프라하에서의 일정이 끝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정오까지 빈둥거려 봅니다만, 허기진 배가 요동치는 것만은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관광하는 건 둘째치고 먹고살기 위해선 결국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밖으로 나가봅니다.


집 근처에 뭐 먹을 거 없나 폐인처럼 돌아다니는데 지하철 역사 안에 작은 빵집이 보입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망설이다가, 인터넷에서 찾은 간단한 체코 회화로 인사를 나누니 주인분이 반갑게 인사하십니다. 작은 빵 하나를 사서 입에 넣으니 몸에 활기가 돌아오는 듯합니다. 그동안 broken english를 계속 사용하면서 부족한 영어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제법 스트레스를 받아왔는데, 영어도 아니고 간단한 회화로 웃음을 주고받으며 빵 한 조각을 사는 게 도대체 지금까지 한 고민과 겪은 감정은 다 뭐였나 싶습니다. 이렇게 허접한 대화에도 웃으면서 반겨주는 사람도 있는데 방금까지 제가 뭘 무서워했는지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거리를 나가서 사람들을 살펴보니 독일에서 보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은 저한테 크게 관심도 없는 듯합니다. 바보같이 자의식 과잉에 빠져 있던 건 아닌지 아차 싶습니다. 한 순간의 이미지와 경험으로 근거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 공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것도 순식간에 그리고 너무 쉽게 일어납니다. 제가 이렇게도 나약한 사람인가 생각하니 힘도 잘 안 나고 허탈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제게 별다른 관심도 없습니다. 트램을 타거나 그 사이를 횡단하는 일만 관심이 있죠.

프라하 외곽을 돌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평정을 되찾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을 보러 다닐지 지도를 펴고 일정을 살펴봅니다. 어제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대로는 돌아다니기 힘들 것 같다고 해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는데, 가이드 투어에서 돌아다니는 주요 관광지가 아닌 조금 마이너한 장소들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프라하 기술 박물관이 평점이 꽤 높길래 찾아가 봅니다. 마침 베를린에서 본 독일 기술 박물관에 크게 감명을 받았기에 프라하의 기술박물관하고 비교를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둘러본 감상을 말하자면, 별로입니다. 규모도 작고 내용도 부실하고 무엇보다 관리가 안 돼 전시물들이 고장이 난 것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내용이 베를린에서 본 것과 중복돼서 솔직히 많이 아쉽습니다.

기술박물관이라고 두근거렸는데
이런 화학 교육 키트는 너무 부럽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겁니다.
과학상자로 만든 광산 채굴용 장비 모델. 어렸을 때 몇 만원씩 하던  과학상자를 마음껏 사는게 소원이었는데...
그나마 볼만했던 광산 재현 섹션.
이게 금전등록기라고..?
과거와 현재의 가전제품 비교. 둘다 익숙한 풍경이라는게 더 신기핲니다.


박물관을 나와서 하염없이 도시를 걷다 보니 날이 너무 덥습니다. 시원한 걸 찾는데 근처 카페에서 프로즌 요구르트를 파는 게 보입니다. 직원에게 주문을 하니 제게 컵을 주면서 셀프로 떠 가지고 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맛의 요구르트를 아이스크림처럼 담고 과일 토핑을 조합해서 가져가니 무게를 달고 계산을 해줍니다. 막연히 그릇당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요구르트를 무턱대고 달았더니 가격이 제법 나옵니다. 그래도 무척 맛있고 시원해서 충분히 값어치는 합니다. 다음에 먹을 기회가 되면, 어차피 무게 단위로 재는 거니 토핑을 더 올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맛있는 프로즌 요구르트.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A|X Praha Palladium이란 쇼핑몰에 도착합니다. 프라하 중심지에 있는 유명한 백화점인 것 같은데 내부를 둘러보니 어느 나라를 가도 쇼핑몰은 비슷한 이미지인 듯싶습니다. 대신 크기가 조금 작아서 그런지 명품 매장들은 잘 안 보이고 실용적인 매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쇼핑을 하면서 구경하다가 푸드코트에서 적당히 배를 채웁니다. 더운 날인데 밖에 안 나가고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곳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피서가 없습니다. 일사병인지 머리가 너무 아픈 게 무리를 하기보단 쉬엄쉬엄 가는 게 좋습니다.

고풍스러운 프라하 한복판에 현대적인 쇼핑몰이 있으니 위화감이 듭니다.

숙소에 도착해보니 빨랫감이 너무 많이 쌓여 있습니다. 숙소는 물론이고 근처에 빨래를 할 수 있는 곳도 보이질 않습니다. 냄새를 맡아봤는데 비에 홀딱 젖었던 빨랫감들을 더 이상 방치하면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하는 수 없이 챙겨 온 빨랫비누를 꺼내서 손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세탁물들을 물에 살짝 불려서 빨랫비누를 골고루 묻히고 빨래판에 문대는 것처럼 힘을 줘서 때를 뺍니다. 그 후 오염물과 비눗물을 헹구는데 두세 차례 헹궈도 계속 빨랫감에서 거품이 나옵니다. 몇 번을 더 헹구고 쥐어짜고 나서야 세탁 잔여물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후 빨랫감을 쭉 짜고 털어서 물기를 최대한 제거하고 빨랫감을 너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나있습니다. 세상에 세탁기가 이 일련의 과정으로 빨래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사함을 느껴봅니다. 손빨래를 끝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서 그대로 뻗어 잠이 드는 프라하의 하루입니다.

오늘 주머니속에 남은 코루나 동전들입니다.옛날 느낌의 굉장히 독특한 디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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