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14일 차, 빈

친숙한 느낌의 도시, 빈입니다.

by 현준

아침부터 정신이 없습니다. 혼자 쓰는 호텔 방이라고 마구잡이로 헤집어 놨더니 떠날 채비를 하는데 정리할게 산더미입니다. 오전 기차를 놓치면 영락없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서두르는 데 아침부터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상한 메일이 하나 날아와 있는데, 어제 신나게 탄 LIME 전동 킥보드가 주차 금지 구역에 주차되었다면서 500 코루나(약 3만 5천 원)의 벌금을 물 수도 있다는 내용입니다. 체코어로 쓰여있기 메일을 번역기로 몇 번을 돌려보며 해석해보지만 역시 경고문입니다, 제대로 주차했는데 어떻게 증명하지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을 많이 소비해서 제쳐두고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니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출발하려고 하니 이번엔 체크아웃이 막막합니다. 리셉션이 없다 보니까 열쇠를 반납해야 하는데 어떻게 반납하는지 알 방도가 없습니다. 현지 전화로 연락해보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고, 하는 수 없이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금방 오지 않습니다. 어떡하면 좋지 어떡하면 좋지 아파트 문 앞에서 20분가량을 허둥거리다가 뒤늦게서야 온 답장을 보고 겨우 체크아웃을 마칩니다. 열쇠를 그냥 방에 두고 가면 된다고 하는데, 그 간단한 걸 명시해두지 않아 불편하게 하다니 리뷰에서 점수를 대폭 깎아버립니다.

Screenshot_20190710-224226_Gmail.jpg 받자마자 근심, 초조, 걱정, 온갖 생각을 다 들게 만든 메일. 다몰라도 마지막에 500 코루나만 봐도 딱 벌금이야긴 걸 알아챕니다.
20190613_140747.jpg 아파트를 개조해서 리셉션도 없는 이런 호텔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습니다.

아침부터 벌금 관련 메일 받으랴 체크아웃한다고 방방 대느라 정신도 없는데 기차 시간 맞춘다고 전력질주까지 하니 완전히 파죽음입니다. 그나마 프라하 역에 도착하니 몇 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에 주머니 속의 100 코루나가 조금 넘게 남은 돈으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사 먹고 사탕 몇 개를 사서 돈을 얼추 다 털어냅니다. 어차피 체코를 떠나면 더 쓸 수 없는 돈입니다.


빈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프라하에서의 일정을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기도 하고 또 재밌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확실히 사람들이 괜히 프라하를 아름다운 곳으로 꼽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여행 온 첫날에 당황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걸 생각하면서, 다음이 있다면 더 재밌는 여행을 즐길 걸 기약합니다.


빈으로 떠나는 고속 열차는 프라하에서 네 시간을 타고 가야 합니다. 긴 여정에 시간도 많으니 기차에서 글이나 써볼까 생각합니다만 곧 관둡니다.,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생각보다 더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이고, 무엇보다 멀미가 좀 나는 것 같습니다. 대신에 같이 타신 아주머니 두 분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시는 걸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여행 동료분이신 것 같은데 수다 떠는 이야기가 친근하고 재밌게 들립니다. 제가 듣고 있다는 걸 눈치채신 건지, 곧 저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보시는데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드리니 깔깔 웃으면서 좋아하십니다. 특히나 딸이 사우스 코리아에 유학을 가있고 저랑 같은 동네인 인천에서 거주한다고 하니 "What a coincidence"가 아닐 수 없습니다. 6주 간의 여름휴가를 떠나신다는 두 분 덕에 기차에서의 시간은 금방 흘러갑니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친근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큰 매력이라는 점입니다. 싱글싱글 웃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니, 예전 같으면 남의 일이라거나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일입니다. 붙임성이 부족한 제게 먼저 다가와 말문을 틀어주시는데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빈 중앙역에서 하차하니 여기는 또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조금 오래되고 어딘가 부실한 느낌이 들었던 프라하의 지하철과는 달리, 세련되고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시 독일어들이 보이기 시작해 여기는 독일인가 싶다가도, 깔끔한 건축물들을 보면 독일보다도 더 현대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숙소까지 트램을 타면 금방이지만 빈의 시내를 느껴보고 싶어 한 시간 정도를 걸어봅니다. 길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캐리어를 끌기에도 무리가 없고 도시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게 왠지 익숙한 거리를 걷는 느낌입니다.

20190616_151502.jpg 딱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빈 중앙역.
20190616_161110.jpg 숙소 앞에 위치한 역사에 멀티플렉스가 들어서 있습니다.덕분에 장보기가 좀 편합니다.

호스텔에 도착하니 스태프 분이 '안녕하세요'하고 한국어로 반깁니다. 리뷰에서 스태프 분이 한국어를 하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들으니 색다르기도 하고 반갑기도 합니다. 특히 호텔 바를 이야기하면서 '해피 아워에 소주도 있어요. 소맥도 가능해요. 소주는 참이슬!'이라고 말할 땐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합니다. 단순한 회화를 넘어 트렌드를 캐치하다니 보통 실력이 아닌 듯합니다. 하긴, 아까 오는 길부터 무언가 '한국적'인 게 이것저것 보이기는 합니다. 호스텔 근처의 역사에서 'Mr. Lee'라는 레트로 한식점이 있는가 하면, 호스텔 바로 맞은편엔 k-pop fandom이라는 카페가 보이기도 합니다. 또 근처에 한인 교회 간판도 본 것 같습니다. 혹시 숙소가 위치한 동네가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곳일까요? 호스텔 로비에 앉아서 몇 시간 죽치고 있지만 아직 한국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20190616_174223.jpg 빈에서 처음 먹어본 불고기는 제가 알던 바로 그맛입니다.
20190616_174228.jpg 한국인 직원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가게 마크가 눈찢일까요? 아시아인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에 기댄 조금 슬픈 상술일까요?
20190616_172927.jpg 무려 카페이름이 k-pop fandom입니다. 어떤 곳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저녁을 조금 일찍 먹고 호스텔 로비에 앉아서 오늘의 남은 시간을 여행지 조사와 글쓰기에 시간을 보냅니다. 빈에 오긴 했지만 아직 빈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도 안 했고, 빈 이후의 일정도 개략적으로 잡고 숙소를 예약해야 합니다. 거의 그때그때 눈앞 잡기로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렇게 쉬는 시간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다행히 호스텔이 잘 꾸며져 있다 보니 로비에서 일하는 데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20190617_090357.jpg 호스텔 곳곳에 이렇게 센스 넘치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너무 귀여워요.

로비에 앉아 있으니 악기를 가져와 연주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낡은 레트로 피아노 하나도 놓여있는데 저도 눈치를 봅니다. 하도 작업만 하다 보니 지겹기도 하고 어쭙잖은 실력이라도 좀 뽐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못 만져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예전에 쳤던 곡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River Flows in You'를 치는데, 듣고 있던 사람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좋은 곡이라면서 다른 이루마의 곡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줍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 이루마의 곡을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괜히 뿌듯합니다. 다른 곡도 부탁하는 눈치인데 더 칠 수 있는 곡이 없으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여행이 끝나면 남들 앞에서 피아노를 자유롭게 칠 수 있을 때까지 너무나도 연습하고 싶어지는 빈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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