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잠에서 깹니다. 창문은 열려있고 제 이불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 험한 꿈을 꾼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아무래도 자는 내내 한바탕 전쟁을 치른 모양입니다. 춥게 자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리는데 잠버릇 때문에 손해를 얼마나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어난 자리를 정리하고 로비로 내려가니 아침 뷔페가 열려있습니다. 며칠 만에 아침을 든든하게 먹으니까 좀 살만합니다. 물론 호스텔 조식 뷔페가 거창한 건 아니지만 빵과 야채를 푸짐히 먹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입니다. 밥을 대충 먹다 보면 패스트푸드나 레트로 음식들을 먹게 되는데 부족한 야채를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입니다. 앞으로 가능하면 조식을 제공하는 숙소에서 묵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돌아다닐 곳은 빈의 중심지입니다. 빈의 중심지는 약 5km의 트램 둘레길인 ringstrasse, 환상(環像) 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팜플랫에 환상 거리를 따라 돌면서 볼만한 것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오늘 하루 종일 보러 다니기 딱 좋을 것 같습니다. 트램을 타고 다니며 중간중간에 내려 포인트를 가도 되지만 걸어서 다니기에도 무난해 보입니다. 운동도 할 겸 하루 종일 걸어 다녀 보기로 합니다.
여정의 시작 점은 슈테판스플라츠입니다. 제가 묵는 호스텔에서 20분 정도 U반을 타고 가면 사람이 북적거리는 광장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의 명물 슈테판 대성당이 보입니다. 천 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당은 빈의 혼이자 상징, 혹은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하더군요. 성당 내부는 거대한 규모에서 오는 위압감과 함께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6유로의 입장료를 내면 카타콤 투어를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가격도 비싸고 사람도 너무 붐벼서 그냥 나오기로 합니다. (그리고 6유로가 그렇게 비싼 입장료가 아니며 슈테판 성당의 카타콤은 정말로 볼만한 곳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슈테판 대성당.
슈테판 대성당을 나와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어갑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 같은 구조물에 설치된 앙커우어 인형시계를 보곤, 가볍게 사진 한 장 찍고 지나갑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유대인 광장이 보이는데 광장 한가운데 서있는 홀로코스트 위령탑이 눈에 띕니다. 위령탑 아래에는 육망성과 함께 유대어로 무언가 적혀있는데 아마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문구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위령탑 아래서 잠시 침묵의 시간을 보내며 추모를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유대인이 오스트리아에 최초로 정착한 곳으로 지금도 유대인들이 많은 곳이라는데 아마 유대인 분이 와서 추모를 드리는듯합니다. 가까이에 유대인 광장 박물관에 들어가 봅니다만, 다소 비싼 입장료에 고개를 저으며 나옵니다. 유대인 광장에 서린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도 궁금합니다만 지갑 사정도 생각하며 다녀야 합니다.
앙커우어 인형시계, 정시가 되면 인형들이 나와서 퍼포먼스를 할 것처럼 생겼지만 구경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위령탑 아래에 히브리어로 쓰인 문구입니다. 연도에서 유추해보건데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기리는 문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링슈트라쎄로 서쪽 외곽으로 궁전 같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무슨 기념관인가 싶어 살펴보니 세상에 대학교 건물입니다. 대학 정문이 무슨 궁전처럼 생겼습니다. 함부로 들어가도 되나 싶어 조금 망설이다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고 따라 들어갑니다. 예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현대적인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광명소인 양 안내데스크가 있습니다. 투어 안내도를 따라 캠퍼스 내부를 돌아보지만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도 강의실과 세미나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안 보이는 건물에 계단 지옥을 거쳐 강의실로 향할 학생들에게 동정을 보냅니다.
대학 캠퍼스의 이런 고요한 분위기도 좋아합니다.
캠퍼스 광장에서 더위에 지친 다리를 마사지하며 잠시 쉰 뒤 여정을 다시 시작합니다. 중간에 부르크 극장,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 등이 보입니다만 공사 중인 곳이 많습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유럽의 관광 명소나 유명 도시들은 언제나 무언가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들인 만큼 수리와 복원에 많은 공을 들이는 거겠지만, 공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보통 공을 들이는 게 아닙니다. 옛 것을 보존하고 개량한다는 의미에선 좋은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옛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새로운 건축물을 짓기 어렵다는 면에선 좋지 않은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 가치관의 차이일 것입니다.
수리중인 오스트리아 의회의사당입니다. 평소라면 내부도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인데 조금 아쉽습니다.
링슈트라쎄를 걸으며 주위에 재밌는 게 없나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마침 계속 신경 쓰이던 생각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독일 문화권에서는 LGBT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고, 이미 사회와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독일에서 여성끼리 키스하며 웨딩드레스를 입는 광고를 몇 번 봤지만, 빈은 뭔가 더 일상적인 곳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곳곳에 무지개 색 깃발이 보이고, 코카콜라는 'Love is Love'라는 캠페인을 제품 차원에서 하고 있습니다. 가끔가다가 두 사람씩 그려진 신호등이 보이는데 빨간 불은 남자 둘이, 파란 불은 여자 둘이 함께하는 신호등입니다. 이런 사소한 흔적들이 LGBT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보여주는 단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빨간불엔 남자 커플, 파란불엔 여자 커플
사실 대기업들의 LGBT 마케팅은 중요한 이슈를 마케팅의 수단으로 뭉게버린다는 비판이 있긴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헬렌 광장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돔 형태로 퍼져있는 호프부르크 왕궁이 보입니다. 광활한 궁전을 보며 '드디어 궁전 다운 궁전을 보는구나' 생각이 듭니다. 궁전 앞에는 오이겐 공의 동상이 보이는데 말이 앞다리를 들고 돌격하는 듯한 자세가 인상 깊습니다. 1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몇십 톤짜리 동상이 고작 말 뒷다리 두 개로 지금까지 균형을 유지하다니 신기합니다. 동상이 서 있는 궁전 입구에는 마차들이 손님들을 태우고 줄지어 다니는데, 성문 앞에서 마차들이 무슨 택시처럼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처에 마구간과 교습소도 있는 모양인데, 도심 한가운데 마차가 활보한다는 것이 좀 충격적입니다. 재미있는 광경이기는 한데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차 때문에 차들이 서행하는 건 둘째 치고, 말들이 가는 길에 똥을 싸는데 치우는 사람도 없고 도로에 짓뭉게지다보니 냄새가 좀 심각합니다. 음... 별로 좋지 않습니다.
호텐부르크 궁전의 모습
역동적인 오이겐 공의 동상.
손님들을 차례로 기다리는 마차들.
호프부르크 왕궁에는 여러 볼거리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박물관이 바로 시시 박물관으로 왕궁에서 쓰던 식기 박물관과 오스트리아 최후의 황후 시시 기념관, 그리고 황제의 거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다른 곳 보다도 시시 기념관에 관심이 갑니다. 황제도 아니고 황후를 메인에 전시할까 궁금해서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찾아보니, 시시의 삶과 생각에 큰 공감이 갔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 황후가 되었지만 엄격한 궁중 예절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자유로운 성격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지만 끝내는 암살을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죠. 남들이 원해 마지않던 황녀의 자리에 있음에도, 그녀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가, 어떻게 삶의 이유를 찾아서 여행을 떠났는가에 대한 기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여행을 돌아보며 시시 황후가 가졌던 생각들을 유추해보고 동질감을 느껴봅니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던 시시를 생각하니 조금 씁쓸합니다.
시시 황후의 유명한 초상입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입니다. 아까 호프부르크 왕궁을 보고 나올 때 잠시 지나쳤던 곳이지만 미련이 남아 다시 돌아와 봅니다. 사실 빈에 와서 박물관이나 어디 실내 시설에 잘 입장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비싼 입장료와 굳이 모든 박물관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만, 그래도 도서관을 그냥 지나친다는 건 제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입장권을 끊고 도서관에 발을 딛는 순간, 도서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저에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지를 뻔합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이게 다 무엇인가 싶습니다. 이층에 걸쳐 로마자가 새겨진 거대한 책장에 고서들로 가득 메워진 이 곳은 책의 천국 그 자체입니다. 도서관의 전시물들은 건립자 카를 6세에 대한 이야기와 소장된 책들에 대한 내용으로 한 가득합니다. 전시된 책들의 소중함, 보관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전시하는 이유를 강조하는데,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도서관의 정신을 살려 전시 중이라는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이런 멋진 도서관의 사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잠시 망상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고서들이 빼곡히 들어선 책장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도서관이 이렇게 멋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감격에 젖은 채 도서관 홀을 나오니 시간이 벌써 늦은 시간입니다. 저녁에는 오페라를 보고 싶은데 줄을 서기까지 시간이 30분 정도 남은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하우스를 빠르게 다녀옵니다. 모차르트가 2년 반 정도 살았다고 알려진 집은 작은 아파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오늘 늦는다는 메시지를 휘갈겨 쓴 악보를 보니 인간미가 돋보입니다. 좀 더 차분히 둘러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만 훑어보고 나옵니다.
모차르트 하우스 입구입니다
하루의 마무리는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오페라를 보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오페라 하우스의 티켓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입석 티켓은 3~4 유로의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판매를 합니다. 다만 입석 티켓의 경우 그날그날의 공연에 대해 1시간 반 전에 판매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합니다. 늦어도 2시간 전에는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해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모차르트 하우스에서 출발이 조금 늦었는지 서둘러서 달려와 봅니다만 벌써 대기줄이 꽤 길게 들어서 있습니다.
오페라 하우스 명패입니다.
대기줄에 서서 멍하니 시간이 언제 오나 기다리는데 전통복장을 입은 호객꾼들이 앉은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티켓이 있다면서 호객행위를 합니다. 사실 이런 호객꾼들은 오늘 빈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곳곳에서 하루 종일 봤습니다. 오페라 하우스 주위에서 대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도 널렸습니다. 제가 찾아본 정보로는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오페라 하우스의 안내원이 아니라 근처에 다른 공연장의 호객꾼들로 절대 속지 말라고 당부를 하더군요. 제가 막 도착했을 때도 안내원으로 착각한 한국인 커플이 그 사람들한테 티켓을 구매하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기다리는 내내 호객꾼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다 무시하는 걸 보면 일상적인 풍경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오늘 공연의 정보를 찾아봅니다. 제목은 L'elisir d'amore, 한국어로 사랑의 묘약으로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골의 한 어리숙한 농부가 지주의 딸을 사랑하지만 지주의 딸은 농부의 사랑을 거부하고 군인과 혼인을 약속합니다. 좌절에 빠진 농부는 지주의 딸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려고 상인한테 사랑의 묘약을 사지만 사실은 상인이 속여서 판 싸구려 술입니다. 당연히 효력은 없고 더 많은 묘약을 원했던 농부는 비싼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합니다. 자신의 인생과 바꿔 구매한 묘약을 퍼마신 다음 날, 농부의 삼촌이 급사하면서 그에게 막대한 유산이 상속되고 그 소문이 동네에 퍼져 온 동네의 여자들에게 구애를 합니다. 농부는 진실을 모르고 그저 묘약의 효력인 줄 알죠. 한편 묘약과 농부의 입대에 관한 사실을 상인에게 들은 지주의 딸은 그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깨닫고 농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맺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지주의 딸은 결혼을 약속했던 군인에게 농부의 입대 계약서를 돌려주고 파혼을 선언하며 이야기는 박수와 함께 막을 내립니다.
사실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익살스럽게 꾸민 이야기지만 개연성은 둘째치고 이런 식으로 맺어진 커플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랑이 아니면 목을 매겠다고 주정 부리며 인생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모든 걸 내던지는 사람과의 사랑은, 그 열정이 식어버리는 순간 고통만이 남는다는 게 제 짧은 견해입니다. 희극으로 우스꽝스럽게 만든 이야기라 낄낄대면서 봤지만 '결국 가짜 약을 판 사기꾼만 좋은 사람 된 이상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공연의 제목
뭐,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오페라 관람은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오페라 하우스의 입석은 좌석 가장 외곽에 서서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좌석에 스카프 등을 매어 두어 자신의 자리를 표시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오페라의 무대 연출도, 주연들의 열창도, 그리고 무대 앞에서 이루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실시간 공연도 신기한 것 투성입니다. 누구 하나 실수하면 흐름이 깨질 수 있는 공연이 이렇게 완성도가 높을 수 있을까요?
입석에서 자신의 자리 표시는 스카프나 손수건 등을 이용합니다. 오른쪽에 곤색 손수건이 제 표시입니다.
공연을 시작하기 직전의 입석에서 바라본 공연장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입석에서 보던 '쉿' 할아버지입니다. 공연 중에 옆에서 속닥이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계속 그쪽을 바라보며 '쉿'을 연발하십니다 1막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떠들던 사람에게 'You talked all the time. Stop it! Stop it' 이러고 막 화를 내시더라고요. 여기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곳이라고 이야기하시는데 조금 무섭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사실 중간에 '쉿'을 외치는 게 더 신경 쓰였던 모양입니다.
순서대로 상인, 영주의 딸, 농부, 마을사람, 장교. 공연 중 사진 촬영은 금지이지만 커튼콜 이후로는 가능합니다.
그렇게 오페라 공연까지 마치고 집으로 향합니다만, 몸이 너무 무겁습니다. 벌써 11시에 가까운 시간에 완전히 파죽음입니다. 정말 쉴 틈 없이 하루 종일 돌아다닌 데다가, 마지막에 오페라를 보기 위해 거의 다섯 시간 반을 꼼짝없이 서있었습니다. 3 유로에 좋은 관람을 했습니다만 그 대가로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듯합니다. 호스텔에 도착해 시끌벅적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씻고 곧바로 잠에 드는 빈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