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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23. 2019

6월 7일, 5일 차, 베를린

유럽 e-sports의 성지 베를린입니다.

오늘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유럽에 와서 첫 장거리 이동입니다. 며칠 묵는 동안 눈에 익숙해진 마인강이랑 작별이라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전날 밤 해 질 녘에 들어올 때 강가의 풍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강 건너 마천루들이 구름에 잠긴 아침의 풍경도 아직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마천루들이 아침 안개에 잠긴 마인강의 풍경

고속열차 ICE(이체에)를 타기 위해 다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갑니다. 독일에 온 첫날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광활한 플랫폼을 보고 설레었는데, 이제는 별 감흥이 없습니다. 지금은 플랫폼 구경보다 화장실이 더 급합니다. 그 넓은 역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고, 심지어 이용료로 1유로나 받는 데에 조금 기가 찹니다. 독일에서 며칠 지내면서 느낀 것은, 공공화장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어도 대부분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에는 개찰구가 없는데 화장실은 철저하게 요금 징수원이 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입니다.

이체에를 타고 떠나는 여정은 안락합니다. 일등석은 공간도 넉넉하고 좌석에 목베개까지 달려있어 앉은자리에서 목을 뒤로 젖히고 기대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공간도 넉넉하여 발을 쭉 뻗고 있거나 의자에서 몸을 옆으로 누이고 있기에도 용이합니다. 이렇게 편안하면 금세 잠들 법도 한데, 이체에를 타고 가는 다섯 시간 동안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의 고속열차 이체에

우선, 검표에 대한 불안감과 경계심이 곤두선 상태이기 때문일 겁니다. 어제 프랑크푸르트에서 S반을 탈 때 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선 유레일 패스를 가지고 있으면 S반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도이츠반 안내센터에서 확답을 받은 이야기고, 실제로 마인츠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오는 기차에서 검표원에게 처음 검표를 받을 때에는 별 말없이 OK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검표에서 아까 검표한 검표원이 다른 검표원하고 와서는 제 유레일 패스를 막 흔들면서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검표원이 'Can I capture it? Can I capture it?'하고 외치더니 획하고 가져갔습니다. '어어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당황해하고 있는데, 검표원들이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서는 'Don't be silly'라고 웃으며 표를 돌려줍니다.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돌려주는 게, 아마 '지금처럼 멍청했다간 사기꾼에게 당할걸?'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마터면 100만 원짜리 표를 잃어버릴 뻔했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습니다. 아마 두 사람은 사기꾼들이 이런 방식을 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자기들 딴에는 제가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예방주사 같은걸 놓아준 걸지도 모릅니다만, 아직까지도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이체에의 검표원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펀칭을 찍어줍니다.)


잠을 청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와이파이 때문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온 이후로 제대로 된 인터넷을 전혀 이용하지 못해서 답답해하던 참입니다. 숙소는 물론이고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S반이나 스타벅스까지 도저히 뭘 할 수 있는 수준의 인터넷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사진을 업로드할 수 있는 와이파이를 만나니 오래간만에 숨이 트이는 기분입니다. 그동안 찍었던 사진의 정리나 밀린 웹툰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베를린에 도착합니다.


Berlin-Spandau Station에서 내린 뒤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내일인 줄 알았던 리그 오브 레전드 유럽 리그(LEC)의 섬머 시즌 개막전이 사실 오늘이었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시간이 촉박해지니까 허둥대기 시작합니다. 점심은 먹어야 하지, 호스텔을 찾아가 체크인도 해야 하지, 이동을 위해선 교통수단 티켓도 끊어야 합니다. 베를린의 웰컴 시티 패스를 이용하면 대중교통 프리 패스와 더불어 여러 관광 명소들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발급을 받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들을 검색해보면, 전부 여행사를 통해서 예약하는 방법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범용적인 티켓을 인터넷으로만 예매 할리가 없다고 생각에 물어물어 몇 번을 헤매고서야 티켓을 발급받습니다. 알고 봤더니 국내 여행사에 예매하고 바우쳐를 출력해서 교환하는 번거로운 절차 같은 건 필요 없고 그냥 아무 티켓 자판기나 찾아서 거기서 출력하면 됩니다. 역시 한국 웹에서 에둘러 정보를 얻는 것보다 현지에서 물어보면서 찾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이 티켓 하나 뽑는다고 한 삽질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옵니다. 펀칭도 반대로 해서 똑바로 다시 펀칭했는데, 이러면 사실 무효표가 됩니다. 다행히 주의만 받고 넘어갑니다.


도착한 호스텔의 이름은 Three Little Pigs Hostel입니다. 익히 아는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호스텔 간판에 불쌍해 보이는 이리가 그려져 있었거든요. 호스텔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묵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크고 넓습니다. 로비도 크고 락커도 제대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와이파이가 매우 잘 잡힙니다. 혼성 8인실인 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럽습니다. 방에서 조금 노닥거리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하므로 LEC 스튜디오로 출발합니다.


아무리봐도 귀여운 이리입니다.

LEC 스튜디오는 베를린 남동쪽 구석에 있습니다. U반을 타고 4~50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베를린의 외진 곳 같습니다. 대로를 따라서 컨테이너들이 세워져 있는데, 컨테이너를 스튜디오로 꾸며 활용하고 있습니다. LEC 스튜디오도 그 컨테이너 중 하나를 대여해서 쓰는 듯한데, 예전에 방문한 종로 롤파크, e-sports 전용 경기장이 얼마나 대단한 시설이었는지 새삼 실감합니다. 스튜디오 로비에서 간단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경기 관람을 기다리는데 캐스터고 해설이고 다들 매우 들떠있었습니다. 얼마 전 세계 대회의 우승컵을 유럽 리그로 8년 만에 가져오면서 완전 경사 분위기입니다. 가을에 있을 월드 챔피언쉽에서 LCK(한국 리그)가 우승컵을 가져올 때까지 잠시의 기쁨을 누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애써 웃습니다.


시즌 오프닝 세리머니입니다. 세계대회 우승의 순간들을 다시 보여주는 군요.


오프닝 세리머니가 끝나고 곧바로 경기가 시작합니다. 경기석과 관람석이 매우 가깝기 때문에 선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끓어오르는 해설진의 열창과 관객들의 환호에 박진감이 넘칩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은가 봅니다. 개막전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경기석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는데 이긴 팀 선수들이 경기석 끝에서 끝을 달리면서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심지어 쉬는 시간 동안 스튜디오 한쪽에서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고 있습니다. 머뭇머뭇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요청하는데 선수들이 기꺼이 어깨동무를 해줍니다. 'Nice Game Bro'를 외치며 따봉을 드니 미드 라이너 캡스 선수가 활짝 웃어줍니다. 한국 돌아가서 게임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리가 하나 생긴 베를린의 하루입니다.


세계 1등 팀과 찍은 기념사진 입니다. 베를린에서 할 거는 이미 다 한겁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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