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나 저버릴 수 없는
50대 중반 자발적 은퇴를 하고 나는 누구도 나에게 뭔가를 쉽게 지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잠시 소홀히 했던 나의 역할이 있었다.
그것은 나는 우리 집안의 8대 장손이었고, 우리 부모님과 동생 부부가 열심히 조상을 모시는
명절과 제사를 거르지 않고 치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해외 근무를 하느라고 명절, 제사와 같은 집안 행사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다.
가끔 한국에서 근무를 할 때도 해외 출장 핑계로 나 대신 와이프와 딸만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직도 딸내미가 아빠보다 자기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더 자주 봤다고 할 정도다.
올 7월에 귀국을 한 후에 추석까지는 아버지 주도로 진행하셨는데, 이번 기제사에 부모님 댁에 내려갔는데
갑자기 이번부터는 내가 동생과 같이 제사를 치르라고, 본인은 옆에서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제사에 사용하는 지방, 축문을 보여주시면서 미리 읽고 연습하라고 하셨다.
일단 사진을 찍어놨고, 지방은 올해 것 기준으로 어떻게 작성하고 어떤 내용이 내년에 바뀐다는 설명을
들었다.
저녁에 드디어 제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음식과 함께 지방을 부치고, 식사를 제외한 음식들이 첫 번째로 차려지고
드디어 축문을 읽는 시간이 되었다.
제사상 앞에 엎드려 축문을 읽으려 하는데 노안으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부랴부랴
돋보기를 끼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축문은 그냥 막 읽는 게 아니라 나름의 리듬에 맞춰 읽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잘 읽어낼 턱이 없었다.
기제사라 모시는 윗대 조상들이 많아서 8대부터 증조부까지 한참을 읽어 내려가야 했다.
~ 尙響 (상향)
이렇게 첫 번째 축문 읽기가 끝났다.
식사를 올리고 다 정리하면서 지방과 축문을 태우면서 기제사는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번에는 미리 준비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간소하게 치를 수 있을까도 잠시 고민을 했다.
이렇게 나의 새로운 임무는 일단 끝났다.
은퇴한 나에게 앞으로 아무도 새로운 일을 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을 동생이 부모님을 도와서 대신했던 것을
이제야 내가 하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지만, 명절이나 제사가 가족들이 고생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랜만에 가족들이 즐겁게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