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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ul 19. 2021

다들 무사히 할머니가 되시라


천하무적 대한민국 중년 여성들이 딱 한 가지 무서워하는 게 있다. 나이먹기다. 다들 죽는 것보다 나이드는 걸 더  겁낸다.


갱년기를 무사히 통과해 나이 60에 이를 즈음, 두려움은 스멀스멀 그녀들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공식적으로 노인 딱지가 붙는 65세가 불과 5년 앞이기 때문이리라.


법률 나이를 손댈 수는 없는지라 다들 자신의 신체, 특히 얼굴에 손대볼 엄두를 낸다. 쳐진 눈꺼풀을 끌어올리는 수술이나 시술 정보를 친구들과 공유한다. 기미,주름 방지 비법을 수소문하며 우정을 다진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한다. 그말인즉슨 이미 젊진 않다는 뜻이긴 하더라만.


만 65세는 오고야 만다. 나를 포함한 동갑내기들은  일시에 약간의 멘탈 지진을 겪었다. 누군가는 우울증과 무력감을 토로했다. 몇몇은 콜레스테롤 지수, 무릎 관절, 척추 통증, 심장 기능이 악화일로라며 의기소침해졌다. 쓸모 없는 인간으로 신분 강등되는 느낌이 노년 진입의 통과의례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일년, 우린 다시 명랑해졌다. 바로 그 쓸모없는 인간으로 누리는 홀가분함 덕분이다. 우린 더 이상 자신이 쓸모있는 인간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유능한 척, 잘난 척 자신을 포장하거나 연기할 필요가 없다.   


숨막히는 사내 경쟁이나 업무 강박같은 발암물질을 용케도 피해나온 생존자인 우리 자신. 아들딸  양육도 의무 복무 연한을 채웠으니 이제 신나게 살 일만 남지 않았나.


지금까지 못해본 일 저지르기를 첫 과제로 선정하자  '국영수' 인생은 순식간에 '예체능'으로 바뀌었다. 라인댄스, 우쿨렐레, 아코디언, 동영상 만들기, 수채화, 요가... 쟁여놓기만 했던 위시 리스트가 쫘악 펼쳐졌다. 팬데믹 속 집콕령에 기복을 겪으면서도 SNS 덕분에 우린 연결돼 있었다. 서로의 변화를 보고하고 응원 격려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들 조금씩 어딘가 아프다. 신장 기능저하, 고혈압,당뇨 같은 기저질환도 있다. 나를 비롯, 심각한 저시력으로 책을 읽기 힘들어진 친구도 늘어난다. 치매염려증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 탐사는 이미 시작됐다. 에이징은 한번도 안 가본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의 끝은 죽음이다.


바로 이 사실 덕분에 앞으로의 나날을 더 쫄깃하게 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지금까지와 다른 자잘한 시도를 해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지 않을까. 더 이상 늦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포기했던 친구 하나는 시니어교통카드 발급 기념으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방역 강화조치로 수업은 잠정 중단 상태지만  '손가락 힘기르기' 연습은 쉬지 않는다. 그리고 즐거워 보인다.


"아침에 눈뜨면 오늘치 연습 분량을 빨리 하고 싶어벌떡 일어난다니까. 나, 전생에 피아니스트였나봐. 하하하."


그렇다면 나는? 음, 남편이 사는 대구 골짜기 길냥이들에게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그들이 집 마당에 눌러앉아버린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가슴을 설레게 하는 뭔가를 발견했다는 것, 이거야말로 할머니 생활의 최대 행운이다.


어떤 왕언니가 말했지. "이번 생의 목적은 가능한 모든 체험을 해보는 것"이라고. 그래, 안가본 길도 기웃대고 싶다. 넘어지고 멍들고 코가 깨질 지도 모른다. 그럼 좀 어때. 별로 잃을 게 없는 걸.


외손주 황혼 육아 요청에 고민하다 1/2 육아 책임을 지기로 선언한 친구가 말했다. "사돈네랑 이야기가 잘돼 반반 육아로 합의했어. 조금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내 노년이 황폐해 질 것 같아서."


그녀의 영리한 전략에 우린 기립박수를 보냈다. 조금 또는 많이 이기적인 할머니가 되는 게 노년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데 이견이 있을 리가 없다.


생로병사의 풀 코스를 완주한 뒤 자연사하기. 이제  친구들과  나의 새 목표다. 물론 행운이 받쳐줘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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