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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Jul 16. 2021

내겐 너무 비범한 그대


남편과의 결혼 30년이 지날 즈음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내가 결혼했던 그 남자가 아니란 사실을. 아이 둘을 낳아 키운 파트너십은 어느덧 종식 중이었고 우리는 각자의 갱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친구 하나는 결혼 30주년을 기해 두번째  30년 재계약 서류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내겐 결혼계약을 갱신할 의욕도, 파기할 행동력도 없었다.  


서로의 직장 때문에 시작된 오랜 주말부부 생활의 불편함이 돌연 쾌적해진 건 이 때부터다. 남편은 직장이 있는 대구 집에, 먼저 퇴직한 나는 서울 집에 떨어져 있는 채 각자 즐겁기 시작했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밥 먹는 게 취미인 나와 달리 남편은 외로운 늑대 타입이랄까. 나이 60 전후, 오래 잠복한 '호작(好作)질' 본색이 드러났다. 별보기가 취미였다. 망원 렌즈를 사들여 망원경을 여러 대 조립한다고 뻐겼다. 다음엔 목공 공구를 사들였다. 스툴을 만들더니 칭송하는 이들에게 선물하기 바빴다. 식탁이랑 침대 제작까지 스케일을 키우더니 작품 전시 공간이 바닥나자 일단 멈춤.


그 사이 대구 집 마당엔 공구와 장비들을 수납할 컨테이너 하나와 비닐막 창고 두 개가 솟아났다. "고물상이 보물상"이라며 동네 고물상 나들이 취미가 추가됐다. 프로판 가스 통을 비롯, 알수 없는 것들을 사들여 본격 잡동사니 호더(hoarder)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일괄 중고처리하는 탁자와 의자  한 트럭분을 집으로 옮겨와 득템이라고 우겨대기까지.


집안 가구를 최소화할 정도로 미니멀리즘의 신봉자인 내게 남편이 천적이었을 줄이야. 결국 내가 남편을 너무 몰랐던 거다.


낯설어진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기 시작한 건 내가 평정심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내 남편이기 훨씬 이전에 그 자신이었음을 나는 오래 잊고 있었다. 남편 배역을 수행중인 그를 아내로서 봤을 뿐이다. 내게 보여지는 달의 한 쪽 표면만을 보듯이 그를 바라봤으니 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까.


요즘 한달에 보름씩 대구와 서울집에 머무는 반반살이가 심리적 거리두기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정리정돈 능력이 꽝인 남편, 뭐든 어질러대는 '어질리우스'' 때문에 열받을 일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 때문에 불행해질 필요가 있을까?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놀이  활동을 하는 건 아니잖는가.


옛 드라마 제목 <네멋대로 해라>가 떠오른다. 요즘 남편과 나의 느슨한 연대에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결혼한 두 싱글이 아웅다웅거리며 나이들어가는 풍경. 설마 우리집만 이런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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