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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상품 Oct 09. 2019

글을 쓰는 사람

가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 자신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공저로 시집을 내기도 했고, 지금도 에세이를 쓰거나 이것저것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작가’라고 소개하지 않는 것은, 아직 글을 쓰는 솜씨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나 자신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탓이 좀 더 클 것이다.


그렇게 나를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나면 으레 통과의례처럼 어디선가 들었던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진다. “얼마나 팔렸어요? 인세는 받으셨어요? 교보문고에 있어요? 나중에 책 사서 사인받아도 되나요?” 사실 이런 질문들이야 웃으면서 대답하기에 별 무리가 없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가끔 내가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질문들이 날카롭게 파고들 때가 있다.


“글을 어떻게 쓰게 되셨어요? 나중에 계속 시 쓰실 거예요?”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중학교 1학년이던가, 그때 처음으로 책방에서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을 빌려보았더랬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바로 전민희 작가님의 「룬의 아이들」, 그리고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였다. 그때만 해도 책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14살의 나는, 위의 두 책을 읽고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졌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던 책이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것에. 그리고 심지어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던 ‘판타지 소설’에서 유려한 문체와 철학적인 주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풍경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그 풍경 묘사가 어느 순간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고. 단순한 인물들 사이의 대화라고 생각한 것이 철학적 주제를 관통하고. 그저 밝은 분위기의 서술이라고 생각한 내용이 너무나도 어두운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고. 한 번 읽었을 때 그저 재미있다고 느꼈던 내용이 문득 ‘아, 그런 의미였구나!’하고 깨달음을 주고. 이 모든 것들이 당시의 나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저 ‘글’ 일뿐인데, 그저 하얀 바탕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뿐인데. 그 ‘글’이 나에게 많은 감정과, 많은 깨달음과, 많은 재미를 가져다주다니. 그렇게 나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두 작가님의 책들은 중학생이던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의 즐거움을 가져다줌과 동시에 꿈이 없던 아이에게 ‘작가’라는 장래희망을 만들어 주었다.


아, 물론. 나는 이 ‘작가’라는 직업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지할 수 없었다. 당시 중학생이 ‘저 ○○이 되고 싶어요!’라고 하면 선생님들이나 부모님이나 으레 그렇듯이 모두 대학교를 간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우쭈쭈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며 나는 ‘작가’가 된다는 꿈을 기억의 저편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글을 쓴다는 것을 기억의 끝에서 끌어오지 못했다.


그러다 2018년 초, 아주 아픈 기억만을 남기고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는 술은 이제 그만 마시고 싶고, 그렇다고 주변 친구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자니 그건 싫고, 그렇게 복잡 미묘하고도 쓰디쓴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하릴없이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글을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여러 개의 짧은 글을 써 내려갔고 그러던 어느 순간 소용돌이로 어지럽던 감정이 잠잠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하나, 둘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쓴 글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한 것이, 그저 취미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어떤 행동이 결과물을 차차 내놓고, 그 결과물들이 쌓이기 시작하면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 솔직히 나는 내가 쓴 글들을 가지고 어떤 결과물을 내놓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출판사에 시나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원했고, 그 결과 2018년 말, 공저로 시집을 냄과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의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타이틀을 획득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린 하나의 꿈을 건져 올리게 되었다. 바로 ‘작가’가 되는 것. 그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책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런 작가. 그리고 항상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단 한마디를 해주기를 바라는 작가.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기억 한구석으로 감춘 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지금도 계속해서 글을 쓰는(물론 이것저것 많이 하느라 자주 쓰고 있지는 못하지만) 나는 단순히 글을 쓰는 것에서 벗어나 조금 더 큰 목표를 가지기 시작했다. 바로 ‘소설’을 쓰는 것. 


시를 쓰는 것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시를 쓰는 것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처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소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제한된 분량 안에 감정을 응축해 풀어내야 하는 ‘시’라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기도 하고. 상황, 인물들 간의 감정선, 풍경 등의 묘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쓰고 싶기도 하고.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시’를 아예 쓰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글이라는 것이 묘하게도 쓰다 보면 이 형식, 저 형식 다 써보고 싶어 지는 녀석인지라.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쓴다면 앞으로 많은 형식의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계속 시를 쓸 것이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대답하는 것에 있어 계속해서 망설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 처음에는 짧은 글, 시를 쓰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것에서 멈추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뿐이니까. 사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앞으로도 계속 ‘시’ 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거든.

아, 나에게 들어온 저 질문에 이렇게 길게 대답하냐고? 아니. 그럴 리가. 누가 이렇게 긴 답변을 기대하고 물어볼까. 그냥 지나가듯이 물어본 것일 텐데. 그렇기에 나는 저런 질문들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아, 운 좋게 출판사에 넣은 원고가 좋은 평가를 받아서요.”

“글쎄요, 시는 잘 몰라도 글은 계속 쓸 것 같아요!” 

아, 중간에 언급 안 한 것이 있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해주었으면 하는 단 한마디. 그 한마디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소박한 한마디이자 가장 듣기 어려운 한마디이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그 한마디는 바로…


이 글 재밌네!


그래서 말하지 않아요adasddqwd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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