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한 정리라는 TV 프로그램을 본 아내가 달라졌다. 버릴 줄 모르던 그녀가 전투적으로 집안의 물건들을 비우기 시작했다. 버리면서 딸아이들과의 추억도 잠시 마주했지만, 아이들이 보던 책, 그림, 소품, 인형들이 사정없이 어딘가에 담겨져서 추억을 비워내듯 사라져갔다.
"설레지 않는 것은 버리라"는 원칙에는 맞지 않았다.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성이 차오르는 아이템들은 가슴 사무친 추억의 매개물들이었다. 이렇게 비워지다 보면 추억도 어느 순간 자취를 찾을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버리지 못한다. 어느 순간엔가 다시 사용할지도 모르는 물건에 대한 미련, 그리고 추억의 마지막 한 조각 단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뽑아든 칼 앞에 그동안 집안에 쌓아오던 나의 장서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내게 말미를 주고 "버릴 책"과 "기증할 책"과 "소장할 소수의 책"으로 분류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기도 하지만, 읽을 때의 그 느낌들을 잡아두고 싶어 빌려서 본 책이 아닌, 적어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책들은 그렇게 책장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허망한 집착이었다.
일단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원한 소유라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나의 삶에서 다시는 한 번도 눈길과 손길을 주지 않을 책들이 뚜렷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전의 뜨거운 감동이나 느낌의 흔적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리고 책도 나와 함께 나이가 들고 있었다. 바래고 책 곰팡이가 나기도 한, 그 세월의 흔적은 책과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들었다.
또 책을 분류하기 위해 다시 펼쳐 든 책은 그 당시의 감동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읽을 때마다 감동이 새롭고 그래서 더 읽고 싶은 책이 아닌 것이었다. 그 당시의 감동만이 전부였던 책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 소유할 의미는 없다면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읽고 난 후 바로 중고로 판매한다는 주변 선생님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 귀한 책을 헐값에 팔아넘길 수 있는지...
그러나 이제는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책의 진정한 가치는 '소장'이 아니라 '소화'였던 것이었다.
음식은 먹어 없애야 진짜다. 난 소유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책을 읽고 나의 존재양식이 달라졌다면 그걸로 족한 거였다. 그중에 정말 다시 읽어서 그 당시 느낌이 아닌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주 소수의 책만 소장해야 하는 거였다.
나의 책 소장 기준은 명확해졌다. 내가 다시 보고 싶은 책인가, 딸 아이들이 볼 수도 있는 책인가... 아니면 버리거나 팔거나 기증해야 한다. 내가 책을 제대로 소화시켰다면 소장의 규모로 나의 지식의 규모와 교양을 증명하지 않으려 해도 된다.
그리고 지금 말고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읽으면서 소화시키겠다는 미뤄둠은 이젠 사정없이 들어버린 나의 나이의 제한 앞에서 무력해진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유한한 기회에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만난다. 미련과 집착 없이 그 순간 최선을 다하며 떠나보내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나이가 들며 배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만 중요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