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성 난청 발발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스테로이드 약을 다 먹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청력 검사를 하고 나서 검사지를 보니 감사하게도 정말 눈에 띄게 청력이 회복되었다. 아직 완전한 회복은 아니어서 스테로이드 투여량을 절반으로 줄인 처방을 받았다.
의사선생님께서 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일이 있냐고 묻고는, 자신도 정말 믿었던 좋은 친구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로 인한 스트레스로 돌발성 난청을 겪은 적이 있었다고, 그 일을 겪고 나서 의학적인 지식을 넘어서 직접 체험한 아픔을 바탕으로 환자분들의 심정이 어떤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나와 동일한 아픔을 이미 겪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이렇게 큰 위로와 힘이 될 줄은 몰랐다.
(돌발성 난청 진단 전에 목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을 찾았을 때도, 코로나 회복 3주 차라고 이야기하니,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이 따뜻한 위로로 느껴졌었다. 목 내시경으로 꼼꼼하게 살피고, 약 처방하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라는 말이 그냥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 걱정이 많은 내 마음을 이해하면서 진정 나의 회복을 바라고 응원하는 말 같아 치유의 희망감으로 정말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었다.)
순간 내가 교사로서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아픔은 사명이다”라는 명제가 소환되었다. 학교 현장에서 마음의 고통과 아픔에만 적용해왔는데,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아픔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동일한 상황의 환자가 어떤지 공감되면서 치료 이상의 힐링을 줄 수 있다는 의미로 새롭게 다가왔다.
재수를 해보지 않고서는 재수의 과정이 어떤지 관념적으로 알 뿐이다. 난 재수의 아픔으로 인해 특히 재수하는 졸업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실패와 좌절을 겪지 않고서는 학생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내가 서울대를 떨어지지 않고 바로 진학했다면 세상적 기준에서는 더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좌절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과도한 기대가 아이에게 얼마나 아픔이 되는지를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아픔을 겪는 아이들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학습참고서도 마음껏 사 볼 수 없었던 형편에, 연년생 동생에게 물려줘야 해서 문제집에 직접 풀지 못하는 걸 습관화하면서 불평하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과 대학 진학해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없었다면,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학생들 입장에서 함께 고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교직 시작 첫해부터 수업을 할수록 목이 아프고, 전체적으로 연약한 육체의 상황을 겪지 않았다면 아픈 아이들의 심정을 다만 일부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사가 되기 전, 내게 있었던 아픔이 학생들을 만나서 사명처럼 이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아플 당시에는 몰랐다.
최근에 본 <유퀴즈 온더블록(2023.1.18.)>에 출연한 예일대 정신과 나종호 교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자살 충동부터 실행까지 10분 정도가 걸리는데 누군가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면 그 확률은 줄어들 수 있다고...
특히 진심으로 들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건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자살 미수자들 중 대부분은 심한 부상을 입었어도 “살아서 다행이다”라고 하니, 후회할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한국 밖에서 바라본 한국 사람들은 너무 열심이어서,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정신건강에는 좋지 않을 거라고...
이제는 우리가 조금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도 관대하고, 우리가 항상 괜찮을 수는 없고, 괜찮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서로 이해해 주기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거라고...
그중 가장 울림 있는 말은...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는다고 해요”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그러한 존재의 당위성과 필요성은 각자 겪은 아픔의 분량만큼 더 커지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 자신의 아픔 자체를 극복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얻게 된다. 아픔을 극복한 후에는 아픔의 항체처럼 스스로에게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 치유의 힘이 가닿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10여 년 전부터 목이 아프고 목소리가 너무 안 나서 고생했을 때도, 휴직을 생각할 정도로 몸이 안 좋고 돌발성 난청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을 때도, 위기 때마다 도움을 주신 이 의사선생님께 정말 큰 은혜를 입은 느낌이다.
아픔이 있어도 뭔가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부터 실제로 호전되는 몸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자주 볼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마치 아파도 괜찮을 거라는 위로와 같은 든든함...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