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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07. 2023

딸이 갑자기 바퀴벌레가 된다면?

큰 딸이 가족 톡에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되면 아... 어떡할 거야?"


동생인 둘째 딸이 답변을 먼저 했다.

"릭 집에 넣어줌 누가 이기나 보게"


큰 딸은 타란툴라 거미를 키운다. 두 마리에 <릭 앤 모티>라는 기괴한 성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이름을 각각 붙여주었고, 모티는 죽고 릭만 홀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딸이 키우는 타란툴라 집에 넣어준다는 의미였다.


큰 딸은 동생의 반응에 흡족해하며 ㅋㅋ를 날렸다.


난 딸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넌 내 딸이다 카프카 <변신>의 그레고리처럼 두지는 않을 거임."


문득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에 심취해서 딸이 질문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딸의 답변은

"(눈물 이모지)

부모님한테 저 질문하기 유행하길래 물어봤오요"


바퀴벌레가 되었어도 사랑할 수 있냐는 물음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나 외형적인 것에 국한하여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통의 단절일 수도 있고, 관계의 균열을 가져오는 상처의 발현일 수도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의 뜻과 기대에 반하는 자식의 모습의 투영일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들에 대한 일정한 기준과 기대를 가진다. 그건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가치와 부모의 삶에 대한 가치관 등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녹아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복음의 가치를 본질로 아이를 바라본다.

그런데 부모가 제시하는 그 기준에 통과하지 못할 때는 어쩔 것인가?


성경 기준으로 예수님의 오시기 전과 후를 구약과 신약시대로 나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율법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과 개입을 하셨다. 신약 시대는 즉각적인 심판에 대해 예수님을 중재자로 한 화해의 다리를 거쳐 은혜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 신약 시대 은혜의 속성 중의 하나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에는 시간이 지나면 의도한 결과에 도달한다는 기대감 외에도 영영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체념 어린 마음비움도 포함된다. 또 의도한 결과에 도달하더라도 그 시기를 특정할 수도, 지정할 수도 없다. 교육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드러난다면 그건 아이가 강압에 의한 연기를 하는 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구약시대의 느낌처럼 바로 절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율법이나 규범은 벌을 하기 위한 장치 이전에 위험한 곳으로 넘어서지 못하게 막아주고 지켜주는 속성을 지닌다. 어릴수록 어린아이들이 납득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왜 그러냐고 따지듯이 되물을 때 미국 엄마들이 주로 많이 쓰는 “Because I said so”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춘기 즈음에는 신약시대의 은혜와 기다림에 맞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납득을 시키고, 이미 납득된 것이나 본인이 인지하는데 잘 안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이가 수치심을 느끼면서 망가지거나 뛰쳐나가지 않도록 부족한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이의 행동이나 성취 등에 의해 부모의 인정이나 사랑 여부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너가 이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니까 더 성장하고 행복해지기를 기대한다는 메시지가 전해져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이유가 있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포스팅했던 내용의 일부


(아래 내용은 필립얀시의 <육체 속에 감추어진 영성>이라는 저서를 참고하여 정리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독일군의 공습에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언제 폭격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했는데 영웅처럼 나타난 자들이 영국 공군이었습니다. 성능이 한참 떨어지는 폭격기로 파리떼처럼 독일 폭격기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영국군의 비행기는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빠른 반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연료통이 조종석 바로 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의 폭격을 받고 폭발하기 전에 탈출하더라도 비행기 구조의 결함상 거의 화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적인 필사적인 노력으로 결국 영국 하늘은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영국 공군은 영웅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심한 화상을 입은 영웅이었죠. 그들을 지탱해 준 건 영웅에 대한 인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갈 때 그들은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 시작한 것은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을 통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코, 눈썹.. 부드러운 피부.. 그들은 영웅적 희생심을 제외하고 나면 괴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간 그 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무서운 모습에 도망가는 가족들,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홀로 남겨진 부류, 다른 한 부류는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

전자는 그들의 외모를 더 사랑한 것이고(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후자는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의 image를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거울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으로 세상에 나아갑니다.

키가 크지 않고, 뚱뚱하고, 얼굴의 배열이 기괴하고, 못생기고.... 뭐 그렇게 남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길들여져 열등감에 빠지고, 그러면서도 우리도 같은 기준으로 남들을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그 극단의 모습이 유물론적 인간관입니다. 상품처럼 인간을 비교해서 가치를 매기지요. 그리고 기준에 낙오된 자들을 가차 없이 내칩니다.

진화론도 유물론에 기초한 것입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들을 도태된다는 것이죠.

히틀러가 유물론적 인간관의 대표주자입니다.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여긴 유태인들을 학살할 명분을 그런 인간관으로 합리화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늘 상처받으며 비교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영국 공군 중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버림받은 공군들은 정신병에 이르거나 외롭게 죽었다 합니다. 그런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큰 공헌을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창조론적인 인간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도 타락하지 않은 본성이라면 외모가 아닌 비교우위로 판단되는 것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입니다. 상품은 비교를 해야 하지만, 작품은 비교되지 않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입체적 구도가 안 맞니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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