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하면서 공부?(Feat. 부모의 개입)

by 청블리쌤

제자가 중학생 동생이 공부하면서 폰을 하고 있어 염려된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스마트폰이 있어도 바로 문자를 확인하지 않고, 자기절제가 되는 자신의 입장에서 아무리 기준을 낮춰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대답해 주었다.

공부하면서 폰을 하는 게 아니라, 폰 하면서까지 공부를 하는 거라고.

폰을 못하게 하면 아예 공부를 안 할 수도 있다고.

폰을 빼앗고 책상에 앉히는 것만으로 본인의 자발적인 공부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게라도 공부를 한다면 의지를 꺾지 말고 넉넉한 마음으로 더 기다려야 한다고.


탈무드에 나오는 이런 예화가 떠올라서 함께 얘기해 주었다.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이렇게 물으니 랍비는 당연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번엔 다른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그러니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렇게 적용할 수 있는 거다.

"공부하면서 폰을 해도 되나요?"

"폰 할 때는 공부하면 안 되나요?"

같은 말인데 어감이 다르다.


이와 비슷한 질문

"공부하면서 음악 들어도 되나요?"

"음악 들을 때는 공부하면 안 되나요?"


아예 안 하는 것보다 음악 들으면서라도 버틸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본인 스스로 시동 걸리면 오히려 말려도 안 될 날이 올 것이니까..

혹 그런 날이 아예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어차피 강제로 시켜도 안 할 학생들은 안 했을 것이니, 차이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제로 억압했을 경우 상처만 더 커지고 관계만 멀어지는 부작용만 덤으로 얻었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강압에 의해서 학원도 가고 공부도 한다. 가만히 보면 공부라기보다는 학원숙제다. 그렇게 양을 늘리는 것도 습관형성에 도움이 되기는 한다. 분명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러나 어느 시점에 주도성을 찾을 수 없다면... 오히려 주도성은 계속 손상된다.


필요에 의해서 학원을 갈 수 있지만 주도성을 잃지 않은 만큼 효과와 효율이 있다. 영영 학원에만 의지하면 안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머물지 말고, 서툴러도 초라해도 조금씩이라도 스스로 해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도록 기다리며 도와주어야 한다.


폰 하면서 공부한다면... 폰을 없애버리면 공부할 것 같지만... 보통은 자신의 의지로 주도성을 갖고 폰을 없애거나 피처폰으로 바꾸는 경우에만 효력이 있다. 큰 딸은 피처폰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했는데, 진짜 공부를 하려고 할 때는 그 폰조차 두고 독서실을 갔다.


중요한 것은 서툰 걸음마 시절에 왜 달리지 못하냐고 다그치는 것이 아예 시작하는 용기를 꺾을 수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인식하는 것이다.

아이가 폰 절제가 안 된다고 해서 망치로 폰을 부수는 순간 아이의 마음도 같이 부서진다.


물론 사춘기 오기 전에는 부모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스로 습관을 형성하기위한 주도성을 발휘할 준비가 안 되었을 것이니 바른 습관을 형성해 주기 좋은 기회다. 물론 과도한 욕심으로 망치지 않도록 아이의 수준과 기질과 준비도를 잘 살펴 가면서 아이만의 페이스를 조절해 주어야 한다. 무조건 부모의 뜻으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도 존중해 주고, 휴식과 놀이의 권리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 따라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사춘기가 오면 부모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 줄 수 있는데 안 주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기 때문에 부모로서 더 어려운 미션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이다.


결국 배움의 즐거움은 자발적인 자기주도성에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갈증을 느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부모의 답답함이 반드시 동반된다. 갈증을 느끼기 전에 부모가 먼저 물을 먹이고 싶은 건 당연한 심정이지만, 결핍과 부족함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 자발성이 동반된 자기주도학습을 시작하게 한다. 갈증도 아이 자신의 것이어야 하고, 해갈의 성취감도 아이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난 자녀교육의 단계를 <구약시대-사춘기-신약시대> 관점으로 보고 있다.

사춘기 전에는 규율을 강조하고 부모의 개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약시대 같은 속성이라면, 사춘기 후에는 신약시대와 같은 은혜가 필요하다.

복음의 속성은 우월감이나 외적 스펙이나 양적 팽창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부족함과 결핍에 솔직해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은혜다. 부모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아이는 영영 결핍과 부족함을 느낄 겨를 없이 과잉공급으로 인해 생기를 점점 잃어갈지도 모른다.


어른의 입장에서 그 시각으로 아이를 온전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어른의 관점을 당장 강요할 수는 없다. 결국 어른의 가치와 기준대로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해야 어른과 아이가 행복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다.

사춘기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조금만 거리를 유지해 달라는 아이들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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