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교시절은 우울했다. 성향상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과 교감이 잘 이뤄졌던 내가 겪게 된 처음 남학교이기도 했고, 고등학교에서 제시한 7년 장학생(고등학교 3년 + 대학 4년)제안을 선택하는 바람에 비평준화지역에서 의도적으로 높은 수준의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으면서 내가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날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등학교에 따라서는 잔재가 남아 있는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특별반에 소속이 되었음에도 충족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목표를 위해 현생(?)과 같은 행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던 공동체의 한 친구가 내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난 그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고, 그 친구는 공부밖에 모르던 내게 삶을 가르쳐 주었다.
연세대를 목표로 순항하고 있던 그 친구는 고3 때 철봉을 하다가 허리 디스크를 다쳤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서 고통스러워하던 그 친구 옆에서 난 눈물로 자리를 지켰다.
공부밖에 모르고, 이기적이었던 내가 다음날 기말고사 준비를 포기했었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3종목 체육실기 만점이었던 난, 그 간단한 지필고사를 대비하지 못해 결국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에도 나의 속상함보다 친구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결국 그 친구는 6개월간 제대로 공부를 못했고 인근 전문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포기를 몰랐다. 어느 날 친구 집에 가 보니 내가 고3일 때보다도 더 열심히 편입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울의 명문대에 편입했고, 대형 증권사에도 입사하게 되었다.
친구가 근무하는 증권사에 찾아가서 스카이라운지 같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던 신기한 기억도 새롭다.
그 친구는 고3 때 기차로 3시간 거리로 이사한 집에서 혼자 재수하는 나를 한 번씩 찾아와서 격려를 해주었다.
나를 찾아왔던 어느 날, 난 우리 교회 여사친 두 명과 함께 만날 자리를 마련했다. 소개팅은 아니었고, 내게는 다 친구여서 그냥 자연스럽게 만났던 것 같다.
친구가 군대를 갔다 와서 내게 형수님 소개해 줄 테니 나오라고 했다. 약속 장소에서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 함께 만났던 교회 여사친 중 한 명과 함께 있었고, 둘은 결혼까지 했다.
친구는 연세대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연세대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리고 매번 최연소 기록을 경신하며 지금은 **은행 본점 지점장으로 있다.
몇 년 만에 전화로 친구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다.
매 순간 리즈시절을 갱신하며 꿈을 키워가는 친구가 너무 멋졌다. 거의 정상에 도달했음에도 아직도 그 이상의 꿈을 꾸고 있었다.
친구는 여전히 로맨틱한 신혼 같은 사랑꾼이기도 했다.
그 친구가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아내에게 딱 한마디만 들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열심히 살았다."
난 이미 충분히 목표 초과 달성한 거라고 축복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전교 1등이었고, 성적의 기준으로는 늘 우월감으로 살았지만, 그럼에도 서울대를 가야 한다는 목표에 눌려, 가장 큰 감성을 키워가며 행복할 수 있는 그 시절을 좀비처럼, 살아도 안 살아 있는 것처럼 거의 마음과 몸이 아픈 채로 지냈었다.
그런 내게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등대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실제로 학교 성적이 다가 아님을 자신의 삶으로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누가 더 잘나가며, 누가 더 성공했는지를 경쟁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안 느끼는 수준을 넘어선 우리 관계는 서로의 선택과 삶의 열정을 존중하고 있었다. 난 그 친구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젊은 시절 자기 말 한마디에 몇 억씩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을 내게 했었다.
난 교사의 말 한마디에 학생들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말로 응수했었다.
경제력과 명예, 사회적 지위의 기준으로 친구는 넘사벽의 비교불가의 존재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학교성적만으로 학생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 없다. 각자 자신만의 최선과 진심을 다하고 있다면, 각자에게 맞는 행복의 자리와 귀한 역할이 있는 것이다.
생활권이 달라지고, 너무 멀어진 거리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연락도 안 하고 지낸 나의 무심함을 몇 년의 시간 공백까지도 다 품어 주듯, 친구는 내게 한결같은 속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올해 3월에 자신은 고아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 가슴이 아팠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그 기억 속에서는 친구 어머님의 쾌활한 웃음소리와 아버님의 기품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한데, 그 기억을 현실로 업데이트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살고 있었던 것 같아 미안했고 가슴이 아팠다.
치열하게 사느라 바쁠 텐데...
현실에 내 자리는 있을까...
하면서 연락을 늘 망설였다. 그렇게 난 누구에게나 늘 연락하지 않을 이유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 소심함으로 난 눈앞에 있는 학생들과의 현재 관계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딸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 한 번 만나자는 기약을 하며 몇 년 만의 전화를 끊었다.
전생처럼 느껴지는 그때의 생생한 기억에서 다시 현생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고맙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