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인근 고등학교에서 체육대회를 마치고 제자들이 찾아왔다. 학생들을 귀가시키고 2시부터 조퇴도 가능했지만 이미 지난주부터 찾아오기로 한 예약한 제자들을 기다려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였다. 기다리는 동안 교생쌤들 피드백도 해드리기로 했다.
교생쌤들을 만나고, 찾아 온 제자들과 한참 이야기를 한 후에...
퇴근 시간을 넘겨서 교생일지 지도교사 답변을 작성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외부 전화가 연결되었다.
예쁜 여자 목소리라서 흠칫 놀랐고 전화를 잘 못 받은 줄로만 알았는데...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만 (거의 20년 전) 경덕여고 제자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는데 신기하게도 갑자기 그 제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화로는 얼굴을 확인할 수 없어 확신은 잠시 머뭇거림이 되었는데... 이내 목소리도 그때의 기억에 싱크로 되었다. 예전의 쾌활했던 여고생의 목소리가 여유로움 속에 묻어났다. 시간 여행을 떠난 것처럼 그 당시 제자의 모습에 나의 30대를 갓 넘긴 젊음이 투영되었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그 이미지와 그때 느낌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제자는 내 목소리도 그때 그대로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제자의 대구가 아닌 곳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양육하느라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로 인사를 드린다는 이야기 끝에...
나도 선명해진 기억에 힘입어 얼굴도 뽀얗고 쾌활한 성격에 아주 예쁜 학생이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자신은 더 이상 그 예쁜 학생이 아니라고,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응답했다.
재작년에 대구시 학부모 강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채팅창에 경덕여고 제자라고 밝혔던 제자의 일화도 들려주며 그 이상의 신기함이라고 연신 놀라움을 표현했다.
재작년 채팅창에 남긴 또 다른 경덕여고 제자의 글
평소처럼 칼퇴를 했더라도 받을 수 없는 전화였어서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퇴근을 했다면 제자라고 밝혔어도 학교에서 내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며, 제자의 용기는 지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자는 온라인으로 자료를 검색하다가 내 블로그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내 실명은 비공개인데다가 청블리라는 별명도 그 후로 한참 후의 것이어서 생소하였음에도, 그 당시 모습을 담은 블로그 캐릭터와 블로그 글을 볼수록 나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블로그 글 중에 근무하는 학교가 언급되어 있어, 스승의 날 즈음해서 학교로 연락해 본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후의 나의 근황을 듣고 찾아뵈려다 망설인 일과 그냥 시간 간격을 건너 뛴 것처럼 내가 상담해 준 내용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잊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인데, 연락이 지속되는 제자들도 물론 특별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시간의 산을 넘고 넘어 기억이 현실로 이어지는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특별한 일이라고 감격하며 제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나이가 훨씬 더 들어서도 여전히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고 계신 것 같다는 제자의 말에 난 (내가 뭘 잘하거나 잘나서가 아니라) 모두 학생들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교사가 된 순간부터 변함없이 학생들이 나의 열정의 이유이자, 목적이자, 성취였으니까.
제자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여고시절의 인정도 내게 충분히 의미 있었겠지만, 세월의 검증을 넘어선 제자의 그 인정에 교사로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너무 미안하게도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못했던 저경력의 젊은 교사일 뿐이었는데, 그 제자를 포함해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날 받아준 순수한 열정의 경덕여고 학생들이 나를 끊임없이 성장시켰고, 그 축복된 만남으로 젊은 날의 열정을 이어가며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자의 전화를 통해 또 한 번 실감했다.
제자에게 스승의 날 받은 정말 특별한 선물이라며 고마운 마음을 거듭 전했다.
너무 행복한 마음에 퇴근하자마자 책장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던 졸업앨범을 찾아보았다.
만 20년 전인 2004년 그 제자가 고 3일 때 영어교사로 만났던 학생이었다.
전화하면서 내가 떠올렸던 그 제자의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소름 돋는 전율이었다.
그 긴 세월을 넘어서도 제자와의 기억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음도,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 같던 그 제자가 졸업 앨범을 뚫고 나온 것처럼 먼저 연락을 해온 것도 믿기지 않는 신기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