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3.) 이별을 편하고 쉽게 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이별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고통스럽고 슬픈 이별의 뒤에는 행복과 진심이 있다.
행복했던 것만큼, 진심을 다한 것만큼 당연히 슬프고 아프다.
이별 후 아쉬움도 별 아픔도 없는 것이 후회 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이별에는 이전의 행복만큼의 고통과 아쉬움과 슬픔이 필요하고 또 진심을 다한 것만큼 긴 슬픔의 기간도 필요하다. 난 그걸 반드시 겪어내야 하는 면제될 수 없는 “슬픔(눈물) 할당량”이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를 떠나게 된 공식적인 마지막 등교일에 내가 떠나는 길에 눈물을 뿌려주었던 학생들을 보고, 나도 무척 슬프고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행복하기도 했다. 나만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 순간 함께 울지 못하고 덤덤했던 나 자신의 감정이 고장 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선생님들의 마지막 배웅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학년실을 마지막으로 나섰을 때도 마치 다음 학기에도 학교에 그대로 출근할 것 같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난 그 “슬픔 혹은 눈물 할당량”이 면제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최대한 미뤄두려는 현실 부정이었고 슬픔의 보류였다. 아직 실감 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눈물을 꼭꼭 억누르고 있었던 거다. 새 부임지 학교 워크숍 다녀온 날 저녁에 그 억제된 슬픔이 봉인 해제되었다.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이후에도 또 문득문득 슬퍼지고 아파할 것임을 난 직감했다.
이별을 슬퍼하는 이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다. 대신 아파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 상황에 뭐라도 해주고 싶어 괜찮다고 위로해 주기도 한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상황의 차이만으로 슬픔의 양을 규정할 수는 없다. 각자만의 아픔과 슬픔의 깊이가 다른 것이니.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고 행복했던 것만큼의 슬픔과 아픔 할당량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며, 위로 등으로 그 할당량을 줄여줄 수도 없다. 그저 감정이입만으로 함께 조용히 아파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삶을 오래 살아 본 경험으로(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직 인생을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글을 썼던 것 같은데 이젠 그런 말을 하는 게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나이어서 많이 슬프다ㅠㅠ) 나를 포함하여 이별을 슬퍼하는 이들에게 이런 위로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슬퍼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슬퍼하라고. 이 세상의 모든 이별 노래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착각해도 된다고. 그 대신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슬퍼하라고,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품으라고. 밥은 먹어가면서 힘내서 슬퍼하라고.
그리고 더 이상 일상을 함께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자리는 빈자리 그대로 채우지 않은 채로 두라고. 그래야 오랜만에라도 연락이 되었을 때 어색함 없이 그 사람과의 교감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매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관계의 퇴화가 아니라 더 발전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단계로 업그레이드된 거라고. 거리의 간격과 절대적 시간 공유가 줄었음에도 끊어질 수 없는 관계로 이어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동의 관계로 살아남는 거라고... 혹 그러다가 기억의 화석화로 현실에서 소환할 수 없는 관계로 이어지더라도 아쉬움보다 이전의 행복감을 추억하면 되는 거라고...
그리고 지금의 아픔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지금의 만남에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행복을 누리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고... 작별의 순간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기보다 주어진 만남의 기회에 그저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행복하면 되는 거라고...
그리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하는 헤어짐이라도 비장한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필요는 없다고... 이후에 자연스러운 시간과 상황의 흐름이 현실적인 관계와 추억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나뉘게 될 것이니 미리 관계 종식 등을 규정하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고...
이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영화 대사와 인용문 두 가지
We can't have the happiness of yesterday without the pain of today. That's the deal.
- 우리는 오늘의 고통 없이 어제의 행복을 가질 수 없어요. 그건 거래죠. - 영화 Shadowlands(1993) 중에서
Nothing can fill the gap when we are away from those we love, and it would be wrong to try to find anything... God does not fill it, but keeps it empty so that our communion with another may be kept alive, even at the cost of pain.
-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 간격을 채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채울 뭔가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간격을 채우지 않고 빈 채로 두셨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이 살아 있는 채로 유지되도록... - Dietrich Bonhoeffer 목사
난 교사로서 일년에 몇 백건의 이별을 한다. 학교를 옮기는 이별은 거리의 간격만큼 그 무게감의 고통의 정도가 더 크다. 더 이상은 자연스럽게 일상을 공유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다소 비장한 다짐과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난 모든 이별의 간격을 다 메워두지는 않고 있었다
아쉬움이나 아픔을 견디지 못해 간격을 메운다는 건 완전한 작별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closure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리움에는 고통이라는 성분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감수하게 되는 건 그리움의 대상이 고통을 초월하는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둘째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애착인형인 곰돌이 푸우를 애착인형이라서 캠프에 데려갔다가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오는 도중 잃어버렸다. 딸은 세상을 잃은 듯 곰돌이 푸우 인형을 애도했다. (나를 곰돌이 푸우선생님이라고 인정해주었던 학생으로부터 선물받은 내 애착인형이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딸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딸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인형이라서 충분히 낡았음에도... 똑같은 인형을 사준다는 나의 바보같은 제안에도 딸이 반응할리가 없었다. 딸은 그 애착인형의 빈자리를 그대로 두어야한다고 오열하며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울음으로 자신의 애착인형을 떠나보내고 애도의 기간을 가졌는데,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앉아 있는 꾀죄죄한 인형을 발견한 극적인 상봉에 딸은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다 가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푸우 인형은 딸의 잠자리를 곁에서 지키고 있다.
그리움은 무뎌지고 고통도 날카로움을 잃어가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의 자리와 그 간격을 메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 현실에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게 우리 행복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