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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보살핌의 중요성

밥먹이고 학교보내주는 걸로 자신이 할걸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


신문지상에서 20대의 부모가 게임에 빠져서 자신의 아이를 돌보지 않고 방치하여 죽음에 빠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자기의 자식을 그렇게 대할수 있을까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부모를 비났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경우는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알수 있었을 것이니다. 결론적으로 아기가 죽었으니까요. 이런 육체의 문제는 판단하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정서적인 면에서도 발생할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 자체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입장 모두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부작용은 심각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하는 것도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인 결핍이 그 많은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부모가 있다고 해봅시다. 아이에게 밥도 주고, 학교도 보내줍니다. 하지만 이 집의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관찰을 해야 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아이에게 다가설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진짜 마음을 아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언어로 표현할수 있을때까지는 기다림과 인정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게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아이가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같이 않은 아이에 대해서 화를 내고, 닥달을 하기 쉽습니다. 자신은 부모로서 재워주고 먹여주고 학교보내 주었는데, 너는 왜 할일을 하지 않느냐라는 시각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공부 하나 하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하냐는 시각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보내주면 모든것이 충족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자신이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부모가 옆에서 감정을 읽어주고 격려해주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도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꿈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생각이 과연 나의 생각인지 잘 알지 못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갈등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됩니다.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경험했던 분들은 먹고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크고, 그러한 결핍을 기본 전제로 사는 분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받아보지 못한 정서적 보살핌은 자녀들에게 줄수도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정서적 보살핌이 빠져버린 삶은, 걷으로 보기에는 먹고 사는것 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깊은 공허감으로 차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은 생명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영혼은 친밀한 관계에서 그 힘을 얻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서적인 친밀감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필요성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서적인 친밀감의 결핍은 알수 없는 목마름을 만들어 내고, 그 목마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욕망이 만들어지고 그 욕망을 채워야만 하는 극도의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음식이 그 해방구였습니다. 정서적인 목마름을 육체의 배고픔으로 인식하고 폭식과 과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한 음식들은 저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수 없었습니다. 소아비만이라는 부작용을 가지게 되고, 아이들에게 더 놀림을 받아서 소외되고 자신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도 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참을수 없는 식욕이 있었기 때문에 먹게 되었고, 결국 그런 저의 모습이 수치스럽고 자신의 몸의 흉한 모습에 좌절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디톡스를 하면서 몸무게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밤마다 기억나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마주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마주하는 고통이 너무 싫어서 음식을 먹는 것으로 피신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살이 빠지면서 그 기억들이 마치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가보 마떼같은 학자들은 오늘날의 사회가 중독을 유발할수 밖에 없는 사회 환경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해서 인류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그러한 고통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 중독이라는 해결책을 찾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고통을 피하려다가 더 큰 중독이라는 고통에 빠지는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속에서 먹고살길이 불안하다고 외치는 최근의 상황을 보면, 정서적 보살핌은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것 때문에 바빠서 정서적 보살핌을 할수가 없다는 말은 성립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정서적 보살핌은 선택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영혼을 가진 존재는 정서적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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