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도구 취급을 받았던 아이들

인간이 아니라 도구로 취급받는 아이들의 고통


얼마전에 학과공부를 하면서 읽게된 책의 내용 중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트라우마관련 분야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자니나 피셔(Janina Fisher)박사의 "트라우마 생존자의 조각난 자아들에 대한  치유 (Healing The Fragmented Selves of Trauma Survivors)"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인데, 아이들이 도구 취급을 받고, 그들의 삶의 복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용만 당했다면 이들은 자살 충동이나 심각한 중독, 식이장애, 자해등의 정신적인 문제를 유발할수 있다고 설명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를 Objectification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객관화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적으로는 도구화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뜻이 살아날것 같습니다. 아이를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우하고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로 보고, 부모를 만족시켜주거나, 어떠한 일을 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집의 경제적인 요구를 채워주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큰딸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서 살림을 한다던지, 자녀들을 자신의 허영심을 채워줄 도구로 사용하는 부모들, 부모들이 분노가 있을때 그 분노를 분출하는 대상으로 삼는것, 심각한 경우에는 딸을 아버지가 자신의 성적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도구로 취급을 받았던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존재에서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도구로서의 가치에서 찾게 됩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진정한 평안함이나 여유를 즐길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것도 하지 않고 여유를 즐기는 삶은 자신의 가치가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가치있는 사람이 되고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도구로서의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때 상대방이 자신을 그러한 도구로 인식하고 대할것이라고 가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마틴 부버의 개념으로 본다면 나와너(I-Thou)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그것(I-It)의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욕구를 가진 인간과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도구로 만나는 것입니다. 욕구를 가진 인간과 도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 내용을 이론으로만 보면 상당히 추상적이고 별로 큰 문제가 안될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도구로 대접을 받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삶을 살아갈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쉽게 인식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자녀들과도 비슷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불린 아이 (A Child Called It)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데이브 펠저(Dave Pelzer)라는 실제 인물을 배경으로 쓰여진 책인데, 그는 어머니로부터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그의 이름 대신 그것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아이는 가족들과 분리되어서 지하실에서나 아니면 차고에서 살았는데 폭행, 굶기기, 강제로 약물투약, 심각한 채벌등의 학대를 끊임없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고, 나중에는 공공기관의 구제로 돌봄가정을 구하게 되고 끔찍한 상황에서 구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 제목이 오늘 정리한 내용과 맞아서 오늘 글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나의 자녀를 도구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정서적 보살핌의 중요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