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막한 뉴욕의 마천루와 자연이 어우러져있는 시애틀의 차이
지난주 저는 시애틀 인근의 자연 속에서 열린 치유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한 세미나장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며 휴식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서부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마음의 경계를 내려놓고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오자, 눈앞에 펼쳐진 빽빽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자연을 떠나 도시로 돌아올 때 느끼는 전형적인 감정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무게가 훨씬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자연의 평안함과 고요함, 그리고 세미나장에서 만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와 환대가 더욱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심 속에서 살아갈 때는 이러한 감정의 무게나 압박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무거운지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도시에서의 삶이 주는 압박감이 점점 쌓일수록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등산을 할 때 빈손으로 오르는 사람과 20kg 배낭을 멘 사람은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체력이 버텨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그 차이는 점점 커집니다. 감정적 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해도, 감정적으로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진 채로는 결국 지치고 주저앉게 됩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저는 제가 감당해야 할 몫 외에도 조상들이 감당하지 못한 감정적 짐들을 물려받아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제 삶에서 발생한 새로운 감정적 상처들 또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누적되었고, 결국 그 무게는 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삶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저는 멈춰버렸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제가 이러한 정서적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단지 제 삶이 왜 이리 힘든지, 왜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 자책하며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감정적 짐은 왜곡된 인식을 동반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흐려지고,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문제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 돌리며 끝없이 자신을 책망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어느 세대에서든, 이전 세대가 물려준 감정적 짐을 인식하고 멈추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정서적으로 성숙한 어른으로서 자신의 짐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책임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녀들이 불필요한 감정적 짐을 짊어지지 않고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서적 상속은 말이 필요 없는 강력한 전달 방식입니다. 아무리 말로 좋은 가르침을 전하려 해도,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정서적 짐이 무의식 중에 자녀에게 전달된다면, 그 영향은 삶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작용합니다. 따라서 이 끊임없는 고통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가’, ‘그 짐이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닌가’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일이 절실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감정적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짐이 당신의 것입니까, 아니면 대물림된 감정의 잔재입니까? 그리고 그 짐을 스스로 인식하고 책임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자녀나 타인에게 떠넘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한 번쯤 멈추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정서적 성숙과 자유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