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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느낌과 감정을 인정하기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느낌과 이로인한 감정을 인정하시나요?

사람들은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느낌을 통해서 감정을 느끼고 그러한 감정을 통해서 세상을 인지하고 언어로 표현하게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가고 세상과 소통을 하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인 느낌을 주양육자와 나누는 과정에서 양육자가 무관심하거나 받아들여주지 않을 경우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검증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느낌과 감정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고 혼란스러워 하게되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의심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둔하게 만들어서 생존하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자신이 사는 세상에 대한 인지와 언어표현도 건강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왜곡되는 상황이 나타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면, 저는 미국을 올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것도 아니고, 30살이 넘도록 한국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아무런 연고가 없는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어떤 삶이 부담스럽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인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거의 60일동안 계속 설사를 하며 몸이 힘들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몸의 반응에 대해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어떻게 돌보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었습니다. 만약 지금의 저라면, 공기좋고 물좋은 곳에 가서 몇일 푹 쉬고오거나, 미국생활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수 있는 분을 찾아서 이야기를 듣거나, 한의사를 만나서 처방을 받거나, 병원에 가서 설사에 대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 받거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설사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요. 나중에 제가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게슈탈트 심리치료에 대해서 배우면서 저는 설사증상과 저의 반응에 대해서 그러한 상황이 무슨 의미인지 알수 있었습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서는 접촉경계혼란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건강한 유기체는 이렇게 환경과의 교류를 통하여 알아차림-접촉주기를 자연스럽게 반복하면서 성장해 가는데, 접촉경계혼란으로 말미암아 알아차림-접촉주기가 단절되며, 그 결과 개체는 미해결과제를 쌓게 되고, 마침내 심리장애를 일으킨다 라고 게슈탈트 심리치료를 개발한 펄스가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접촉경계혼란의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 김정규)


클라크슨이 보고하는 한 내담자는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데 한기를 잘 느끼지 못하여 옷을 잘 챙겨입지 않아 자주 감기몸살을 앓았다. 그녀는 어릴 때 부모들로부터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버려져 자란탓에 신체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렸고, 그래서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생리적인 변화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감각이나 자극들을 골라내 지각에서 배제시키는 방법을 학습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소외시켜버린 것처럼 보였는데 직장에서 하루종일 로봇처럼 쉬지 않고 일만 해서 고용주가 걱정이 되어 그녀를 상담소에 보낸 것이었다. (Clarkson, 1990, pp. 46-470


위의 내용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어린시절 부모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감각이나 자극들을 배재시키는 방법을 학습함으로서 자신이 인지적으로 고통받는 것을 최소화 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저는 제가 왜 60일이 넘는 기간동안 설사를 하면서도 그러한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무시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더 저의 집에 대해서 알게 된것은, 몸이 힘들고 피곤할때 어떻게 그 피로를 풀고 휴식을 취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집안에서 그러한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여유있게 가족끼리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거나,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고 더 좋은 방안을 찾아내는 작업을 같이 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가족간에 숨기고 말을 안하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 지금까지 어리석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힘들다는 것도 모르고 미련하게 혼자 다 짐을 짊어지고 살아오느라 지쳐버린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따뜻한 곳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면 따뜻함이 있고, 주위에 도움의 손길들이 있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나누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끔 저는 저의 심장에 손을 얻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너무 수고했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서러웠니, 너는 정말 열심히 살았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알아. 힘들면 조금 쉬어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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