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맥주 사 와!
난 10년이 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 앞에서 감상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언제나 크게 웃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날은 먼저 살던 집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려고 냉장고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안에는 1년 넘도록 방치되어 있던 수입 맥주 한 캔이 있었다. 아들이 휴가 나올 때 친구들과 마시고 남기고 간 것이다. 버릴까 말까 하다 마셔 보기로 했다. 수입 맥주는 무슨 맛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제는 마셔도 될 것 같았다.
탁 소리가 나며 거품이 새어 나왔다.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한 모금을 넘겼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눈이 동그랗게 떠질 만큼 놀랐다. 오래전에 알던 맛과 전혀 달랐다. 맥주 특유의 씁쓸함이 없었다. 순식간에 벌컥대며 마셔버렸다. 난 국내 두 군데 맥주 회사 밖에 모른다. 새로운 신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얼마 후 농막이 완성되고 거처를 옮겼다. 모든 정리가 끝나자 그 맥주 생각이 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사하는데 정신이 팔려 브랜드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아들이 제대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하는 날, 녀석은 서울 집으로 가지 않고 아빠와 한 달을 지내겠다고 했다. 내키지 않았다. 나만의 소중한 공간, 이 아늑한 농막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고 책을 읽거나 조용히 글을 쓰면서 보냈다. 밭일하면서 가끔은 바다도 보러 갔다. 이렇게 방해받지 않고 소박한 사치를 누리던 생활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아빠가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아들을 이곳 농막으로 데리고 오자마자 맥주에 관해 물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입에선 전 세계 맥주 브랜드가 술술 나왔다. 친구들과 마신 맥주뿐 아니라 고1 때 네팔 트레킹 가서 마신 맥주, 고2 때 북유럽으로 수학여행 가서 마신 수제 맥주를 넘어,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프랑스산 과일 맥주 맛이 어떻다는 등 하면서 품평을 해댔다. 아이러니하게도 술 끊고 산 제 아빠보다 아들이 맥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술 끊고 살았는데 하는 억하심정이 들면서 순간 열이 받쳤다. 억울하고 분해서 라도 이제부터 마시기로 했다. 기특하게도 녀석은 아빠가 원하는 맥주 맛을 짐작하고 수입 맥주인 기** 흑맥주를 추천해 주었다.
“아빠, 읍내에 가면 기** 흑맥주 사와”
“야, 내가 아들 녀석 술까지 사다 줘야 하냐?”
“아빠가 마시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그래도, 하여간 좀 이상하잖아”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옹졸한 마음도 들지 않고 별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운전면허가 없는 녀석이 읍내 편의점에 갔다 올 수는 없다. 차를 몰고 편의점으로 냉큼 달려가 맥주를 사 왔다. 어쩌면 그렇게 아빠의 입맛을 정확히 집었는지, 부자지간에 저녁마다 마주 보고 앉아 편하게 맥주를 마셨다. 내 나이 때 아빠들이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아빠와 23살 된 아들의 비좁은 농막 생활은 술과 함께 시작됐다.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예상한 데로 나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녀석은 열한 시나 돼서 일어난다. 잠자는데 깨일까 싶어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 수도 없다. 녀석은 온종일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그림을 그리거나 게임을 한다. 정 듣고 싶으면 난 이어폰을 끼고 밖에 나가서 들었다. 그깟 음악이야 한 달만 참으면 되지 하면서 버텼다. 내가 먼저 잠자리에 누우면 녀석은 음악 볼륨을 줄이고 그림을 그렸다. 이곳의 밤은 무척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더 크게 들렸다.
일주일 가량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 녀석이 틀어 놓은 음악을 매일 듣다 보니 좋아지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볼륨을 높이라고 하곤 같이 들었다. 아들과의 음악의 경계가 엷어졌다. 서로 좋아하는 게 달랐던 것이 아니다. 단지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녀석에게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앱을 폰에 깔아 달라고 했다. 녀석이 서울로 올라가고도 혼자 듣고 싶어서다. 맥주와 음악, 이렇게 아빠와 아들은 또 같아진다.
난 그중에 이 세곡을 특히 좋아한다.
All the king, s Horses.
Hillary Schott & The Schott Family- Thy will.
Elephant-Dynasty.
며칠 전 아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날 저녁 나는 폰에 깔아준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맥주를 마셨다. 녀석이 떠나면서 한 말이 생각 나서다.
“아빠는 정말 훌륭했어”
[녀석... 그런 말은 왜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