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이지 않아도 타당하다면
나는 나답게 산다.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은 사람

by han



지금은 농부인 난 작고 멋진 공간을 평생 꿈꿔왔다. 아이들이 떠나면서 드디어 기회가 왔다. 농막용 컨테이너를 특별 주문했다. 겨울, 내 정화조를 묻고 수도와 전기를 설치하고 완성된 컨테이너를 앉혔다. 그리곤 방 4개에 화장실 3개가 딸린 집에서 나와 이곳으로 옮겨왔다. 세간살이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서울 집으로 보내고도 버리고 나눠주기도 쉽지 않았다. 집 앞 밭에 놓고 검은 연기 펄펄 내며 소각해 버릴까 하는 나쁜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착한 양심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모두 처리하는 데 삼 개월씩이나 걸렸다.


이렇게 말하면 욕심 없고 무소유를 주창하고 고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학교에선 경제학을 공부했고 이해타산은 나름대로 밝아 내것은 꼭 챙긴다. 단지,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으로 여긴다.

집도 고향도 서울이다. 여기 영양과 경상도에는 연고가 없다. 훗날 아들 녀석이 내려와 농사짓고 살 가능성은 0.1%도 안 된다. 집을 짓고 그것을 다시 재산 가치로 환산해서 따지며 부동산을 성경 말씀처럼 받들며 살고 싶지 않다. 돈 낭비일 뿐이고 얽매이기보다 자유로운 삶이 좋다. 가벼워야 멀리 날 수 있다.


몇 달이 지나자 행운이 찾아왔다. 나의 버킷 리스트 첫 번째인 작가가 됐다. 이제 두 번째 버킷 리스트에 도전하려고 한다. 시간 반 남짓 걸리는 포항 바닷가에 작은 단독 주택을 알아보려고 한다. 색다른 글쓰기 모임 만들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담은 이야기가 있어도 끙끙거리기만 할 뿐 입도 달싹거리지 않는다. 내가 그랬듯, 얼마나 가슴에 응어리가 찬 듯 답답할까 싶다.

지금은 인터넷이 결합한 모바일 시대다. '글'이 동인지 작가나 유명인들만의 전유물에서 벋어 난 지 오래다. 페이스북, 블로그, 카페 등에서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맞춤법과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혹은 브런치의 나의 글을 읽고 바닷가 나의 공간으로 찾아온다면, 견과류 듬뿍 얻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새콤한 요구르트와 향기 가득한 원두커피를 대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농사철에는 영양에서 나머지는 바닷가 공간에서 글을 쓰며 지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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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빠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아빠는 더 많이 후회할 사람이야.”

“야, 내가 나답게 살았는데 후회할 일이 뭐 있다고...”

“남들처럼 후회하는 게 아니라, 아빤 하고 싶은 게 무척 많은 사람이라 그래.”


아들(23)과 지역 문화센터에서 샤워하면서 나눈 대화였다. 녀석은 이 아빠를 정확히 알고 있다. 혼자 상상만 하고 자라서 그런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조금씩 오래도록 준비해서 언젠가는 꼭 실천한다.

예를 들어, 냉전시대 이자 해외여행을 정부의 허락받고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간도 크게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는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한 생각을 했다. 지금은 누구나 가는 여행이 되었지만, 당시에 그런 꿈을 꾼다는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망상으로 치부되는 시절이었다. 통제된 사회에서 일반인에게 외국은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난 꿈을 꿨다. 그리고 1989년 내 나이 26세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됐다.

성인이 된 후, 사업차 서울에서 출발하여 중국, 태국, 인도, 터키, 러시아, 영국, 스페인 등을 찍고 파리를 경유해서 돌아서 온 적도 있었고 하루에 비행기만 3번씩 갈아탄 적도 있었다. 그 밖에도 많은 나라를 다녀왔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엔 먹고살려고 했다면 지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가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농부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오래전 촌에서 농사짓는 부모와 사는 예쁜 여자아이를 사귄 적이 있었다. 난 정말 그녀와 알콩달콩 살고 싶었다. 그러자면 농부가 돼서 그 집 '데릴사위' 라도 들어갔으면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과 함께하려고 소박한 농부나 꿈꾸는 앳된 남자도 되지 못한 아이에게 실망하고 떠나갔다. 열심히 지게 지고 밭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내가 순진하고 멍청했다. 사람 못 만나고 자라나 세상 물정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를 먹고 결혼을 했다. 내 어린아이들을 세상과 주변으로부터 지켜야 할 일이 생겼다.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사라져 가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서 끌어 앉고 웃음을 줘야 했다. 곁에 두고 보살 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때 농부가 생각났다. 이 판국에게 이리저리 재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크게 결심할 것도 없었다. 막상 농부가 돼 보니 그런 데로 할만했다. 항상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아침마다, 아이들이 등교할 때 재미난 인사를 했고 밤이면 모여 놀았다. 방학 때면 삼시 세끼를 함께 먹었다. 전에도 웃었지만, 그 후론 장난꾸러기 아빠가 되어 더 크게 웃었다. 밥 먹고 이야기하고 웃는 것, 이런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빠로서 자격 미달이다. 아빠는 위로받는 존재가 아니라 위로하는 존재다. 웃지 않는 아이들 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최악이다.


“오늘도 학교에서 잘 놀다 와, 파이팅!”


아빠가 잘 놀다 오라고 주먹을 불끈 쳐들어 쥐고 아침마다 성화를 부려도 아이들은 공부만 잘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 결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업을 하고 여행을 했던, 농부가 됐던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기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서 아빠의 품을 벗어났다. 임무는 완수했고 삶은 계속된다. 난 오래도록 바닷가에 서있는 훗날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반백의 머리, 잔 근육에 구릿빛 피부, 거칠어 보이는 얼굴, 왼쪽 어깨부터 목 아래까지 크게 새겨진 문신은 감춰지지 않고 슬쩍 보인다. 그런 사람이 요리를 하고 글을 쓰는 작가다. 마음도 몸도 구부정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

인기가 있든 없든 '그것이 아니라고' 글로써 소리칠 뿐이다. 얌전히 순응하며 살지 않고 사는 그날까지 뜨거운 숨 거칠게 내쉬고 싶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통적 작가들 모습과는 괴리가 있다. 남들이 한다고 나도 그렇게 보이고 행동할 필요는 없다. 내가 작가가 됐지 작가가 내가 된 게 아니다. 난 이런 사람이다. 보편적이지 않아도 타당하다면 나는 나답게 산다.


참고로 문신은 아직 하지 않았다. 아들(23), 딸(21)과 협의하여 멋지고 강렬한 디자인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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